날렵한 눈매를 가진 소녀는 “돈 받고 사람 죽이는 게 일”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도적: 칼의 소리’(이하 도적)에서 배우 이호정은 조선 출신 청부살인업자 언년이를 연기했다. 전투 실력은 홀로 포병대 하나를 박살 낸 도적단 우두머리 이윤(김남길)과 어깨를 견줄 정도. 이호정은 1년 반 동안 액션스쿨을 오가며 언년이의 강인함을 익혔다. 한 분야에 정통하려면 최소 1만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법칙이 그에게도 통한 셈이다.
“부모님이 ‘도적’을 많이들 봐달라며 주변에 떡을 돌리셨대요.” 지난달 27일 서울 안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호정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흙칠을 지운 얼굴은 말갛고 해사했다. 중학생 때부터 모델로 활동하다가 2016년 배우로 전향한 그는 ‘도적’으로 주연 데뷔 신고식을 치렀다. 서부극 분위기를 살리려고 오디션 때 술이 달린 옷에 워커를 신고 가는 등 열의를 불태웠다고 한다.
‘도적’은 1920년대 간도에를 배경으로 조선인과 일본군의 충돌을 그린 이야기. 언년이는 부모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죄로 처형당한 고아다. 신념조차 사치인 시대의 생존자 언년이를 이호정은 “과하지 않고 담백하게” 연기하려고 했다. 액션 장면에선 “내가 죽더라도 네 다리 하나는 가져가겠다는 근성”과 “다년간 킬러로 일하며 익힌 심리전”을 고루 표현했다. 노력이 통한 걸까. 같은 작품에서 호흡을 나눈 김남길은 이호정을 “‘도적’의 주인공”이라고 칭찬했다.
이호정은 “‘도적’이 내게 ‘너 아직 부족해’라며 다가오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남성 배우들과도 몸을 부닥치는 고난도 액션을 소화해야 하는 데다,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이중적인 결을 가진 인물이라서다. “작품을 준비하면 할수록 내 부족함이 크게 다가왔어요. 뭘 더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많이 안겨줬죠.” 자신의 미흡함 앞에서 이호정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즐겁다”며 미소 지었다.
어쩌면 그의 동물적인 본능을 ‘도적’ 촬영장이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이호정은 “배우와 스태프 모두 치열하게 작업했다”고 돌아봤다. 선후배 할 것 없이 촬영장에 일찍 모여 세트와 소품을 어떻게 활용할지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카메라가 돌면 누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일에 집중했다고 한다. 이렇게 완성된 ‘도적’은 공개 2주 만에 전 세계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시리즈 중 두 번째로 높은 인기 순위를 기록했다.
“어떤 작품이든 저 자신에게 아쉽지 않은 것은 없었어요.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고요. 그런데 운 좋게도 그런 시간이 오히려 제게 도움을 준 것 같아요. 최악이라고 느끼는 순간조차 말이에요. 연기엔 정답이 없고 여전히 어려워요. 하지만 연기가 점점 재밌어집니다.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어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