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종영한 MBC 드라마 ‘연인’에서 유길채(안은진)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에 붙잡혀 포로가 됐다. 몸을 더럽히느니 죽는 게 낫다며 동료 여성들이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와중에도 그는 살아남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자신에게 사람들이 “낯 두껍다”고 욕을 할 때나, 남편 구원무(지승현)가 정절을 지켰냐고 물었을 때도 그는 살아남았다. 이런 길채를 오직 이장현(남궁민)만이 위로한다.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자신이 어떠냐는 길채의 말에 장현은 이렇게 답했다.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
배우 안은진은 이 장면을 찍으며 많이 울었다. 지난 21일 서울 서초동 한 회의실에서 만난 그는 “대본을 읽으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선배님(남궁민)도 그랬다고 한다. 모두에게 소중한 장면이라 준비를 많이 했다”고 돌아봤다. 작품은 길채의 눈으로 전쟁을 다시 본다. 무능한 지배층이 외면하고 가부장적 사회가 ‘더럽혀졌다’고 낙인 찍은 존재가 바로 길채 같은 여성 포로다. 안은진은 “(시대상에 대한) 작가님의 신랄한 비판”이 돋보인다고 했다. 대본엔 인옥(민지아) 등 포로들의 이름과 과거 이야기도 자세히 쓰였다고 한다.
‘연인’은 자체 최고 시청률 12.9%를 넘기며 인기리에 막을 내렸지만, 처음부터 기대작은 아니었다. 경쟁작 주연 배우가 “작품 제목이 뭐라고요?”라고 물을 정도였다. 안은진은 마음고생이 더 컸다. 길채가 친구 경은애(이다인)의 약혼남 남연준(이학주)에 눈독을 들인 초반 장면에선 ‘주인공이 너무 얄밉다’는 혹평이 쏟아졌다. 안은진은 “초반 길채 캐릭터를 잡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좀 착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감독님과 작가님은 날카롭게 표현해달라고 주문하셨다”고 돌아봤다.
미운털은 오래 가지 않았다. 병자호란 후 피난길에 오른 길채가 방두네(권소현)의 출산을 돕는 등 기지를 발휘하며 작품도 입소문을 탔다. 안은진은 “어떻게든 살려는 길채가 멋졌고 능동적인 캐릭터라 좋았다”며 “‘난 살아서 좋았어’ 등의 대사가 거대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길채는 역사에서 지워졌던 당시 여성들의 주체적 열망을 표현하고, 종종이(박정연) 등 동료 여성들을 구해낸다. 한때 삼각관계였던 은애와도 “두 사람이야말로 ‘찐사랑’”이라 여길 만큼 깊은 우정을 나눈다. 안은진은 “지극히 평범했던 길채가 전쟁을 겪으며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여줄 수 있어 좋았다”며 “길채뿐만 아니라 은애 등 다양한 여성들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이 담겼다. 시청자들도 그 모습을 응원해주신 것 같다”고 짚었다.
장현을 연기한 배우 남궁민은 “존재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선배”라고 했다. 촬영이 시작하면 ‘멜로 눈빛’을 뿜어내 “눈을 갈아 끼우는 건가” 생각했을 정도란다. 남궁민은 대본을 꼼꼼하게 분석하며 캐릭터를 연구하는 노력파 배우로 유명하다. 안은진은 “선배님이 장면 안에 깊이 들어가 계신 덕에 촬영장에서 눈만 봐도 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두 사람은 드라마 종영 직후 한국방송촬영인협회가 선정하는 그리메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연기상을 나란히 수상했다. 안은진은 “‘연인’은 길채와 장현의 사랑 이야기, 민초의 삶과 지배층 이야기를 골고루 밀도 높게 다뤘다”며 “이런 멋진 작품에 참여해 기쁘고 영광”이라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