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6)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6)

​모네는 왜 센 강의 보트를 아틀리에로 만들었을까?

기사승인 2023-12-07 11:41:14
클로드 모네, ‘모네의 스튜디오 보트’, 1874, 캔버스에 유채, 크롤뢰 뮐러 미술관

1871년부터 1878년까지, 모네(Claude Monet, 파리 1840~지베르니 1926)는 파리 바로 외곽의 센 강에 있는 아르장퇴유에 살았다. 

모네는 화가 도비니(Charles-Fracois Daubigny)를 따라 물 주변을 그릴 수 있는 보트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그는 어떤 장소이든 물과 풍경에 대한 빛의 효과를 묘사할 수 있었다. 

‘모네의 스튜디오 보트’를 들여다보면 배는 물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두 기둥에 묶여 있다. 화폭 대부분엔 잔잔한 강물이 흐르고 있어 보트 스튜디오와 나무들 그리고 하늘을 비추고 있다. 이 작품에서 모네는 여름날 물 위의 고요함에 대한 인상을 표현하고 있다.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에 있는 화가 도비니 흉상

도비니는 프랑스 바르비종(Barbizon) 파의 화가로 강 풍경을 많이 그렸다. 모네의 마지막 안식처이자 활동 무대인 지베르니에 도비니의 흉상이 있다. 변화하는 자연을 민감하게 포착하여 그리는 그의 화풍이 인상주의와 가까워 모네의 존경을 받았다. 빈센트 반 고흐도 ‘도비니의 정원’을 남겼다.

빈센트 반 고흐, ‘도비니의 정원’, 1890, 캔버스에 유채, 50x100cm, 루돌프 슈태헬린 컬렉션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파리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27km 떨어진 교외 도시로 19세기 동안 세잔, 피사로, 코로 등 화가들이 작품 활동을 했다. 도비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1878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고, 반 고흐 역시 그의 마지막 70일을 그곳에서 보냈다.

반 고흐는 도비니의 부인이 살고 있는 집과 목가적인 정원을 가로로 긴 캔버스에 그렸다. 이것은 세로 50cm, 가로 1m인 파노라마 크기의 캔버스로 반 고흐가 보편적이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자연을 훨씬 더 강렬하게 묘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73년 문을 연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이 마침 개관 50주년 기념전시회를 하여 파노라마 크기로 작업한 오베르 시절의 풍경화를 여러 점 볼 수 있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절 광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수평적인 형식을 선호했던 반 고흐는 '매우 존경하는 화가에 대한 헌사'라고 테오에게 1890년 7월 24일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그는 “나의 파노라마 캔버스 중 하나인 ’도비니의 정원‘을 소재로 그린 작품을 다시 스케치한 것이다. 내가 가장 세심하게 생각해서 그린 작품 중 하나다”라고.​​

작가 알베르토 망구엘은 "그림으로 구성된 언어가 말로 표현되고, 말이 다시 그림으로 모습을 통해 드러낸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가 받은 인상을 통해 실존을 재해석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형상들은 상징, 기호, 메시지, 알레고리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어쩌면 그런 것들은 우리의 욕망과 경험과 탐구와 갈망이 만들어 낸 실체 없는 껍데기, 즉 허구의 실체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림도 말처럼 인간의 실존을 표현하는 수단임에는 틀림없다“고 덧붙였다.​​
모네, ’보트 스튜디오‘, 캔버스에 유채, 1876, 60x72cm 반즈 재단(Barnes Foundation), 필라델피아

이 그림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전의 화가들은 야외에서 스케치를 하고 아틀리에로 돌아가 완성을 하곤 했는데, 이는 스케치가 완성작이 아닌 습작일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르비종 파의 대부인 카미유 코로의 경우 봄, 가을 등 날씨가 좋을 때 풍경을 스케치를 한 다음 여름이나 겨울에 작업실에서 그림을 완성했다. 

그러나 모네는 “언젠가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자신이 시력을 되찾았을 때 자기가 본 것을 아무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그려보고 싶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렇게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색채를 현장에서 화폭에 담아 완성했다.

에두아르 마네,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1874, 캔버스에 유채, 83x105cm, 노이에 피나코테크 뮌헨

아내 카미유를 그리는 모네를 그린 마네(Edouard Manet, 1840~1883)의 작품이다. 

모네의 작품을 비롯해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는 강이나 바다를 비롯한 물이 자주 등장한다. 야외에서 직접 보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색만을 믿었던 모네였기에 물에 반사되는 대기의 온도에 따라 변화하는 색을 포착하기 위해 보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하고 지향했던 ‘현장성’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들이다. 

주로 마네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가 많이 알려져 있지만 네덜란드 크롤뢰 뮐러 미술관에서 모네가 같은 해인 1874년 아르장퇴유에서 그린 ‘모네의 스튜디오 보트’를 발견했다. 1876년에 그린 보트 스튜디오 작품이 두 점 더 있다. 

지금 우리가 마네와 모네를 구별하기 어려운 것처럼 당대도 에두아르 마네와 클로드 모네는 성이 비슷하여 많은 이들의 혼동을 일으켰다. 

마네가 문제작인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는 살롱에서 낙선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반면1866년 모네는 카미유를 모델로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나흘 만에 완성하여 살롱에 입선한다. 

알파벳으로 쓰여진 성은 더욱 혼동을 일으켜 사람들은 마네에게 축하 인사를 했을 정도였다. 마네는 이미 미술계에선 유명인사였고, 베르트 모리조의 경우 카미유 코로에게 그림을 배우고 있었지만 마네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 

1863년 살롱에서 떨어진 작품들을 모아 전시한 낙선전에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를 보는 순간 새로운 표현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 모네, 르누아르, 바지유, 피사로 등 20대의 젊은 화가들은 샤를 보들레르와 에밀 졸라와 함께 마네를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존경하게 된다. 

모네를 소개해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던 마네는 몇 년 후에야 카페 게르부아(Le café Guerbois)에서 만나자고 모네를 초대한다. ‘마네와 모네가 처음 악수를 나누던 순간에 인상주의는 시작되었다’고 미술사학자 이동섭은 말하고 있다. 8살이 많은 마네는 작품에서 추구하는 이상이 같았기에 모네와 친분을 유지한다.

모네, [보트 스튜디오], 1876, 캔버스에 유채, 65x55cm, 뇌샤텔 역사 미술 박물관 (Musee_d'Art_et_d'Histoire_Neuchatel), 스위스

1878년 이주한 센 강변의 베퇴유 시절의 모네는 경제적으로 무척 곤궁하여 센 강에서 자살 시도를 할 정도였다. 마네에게서 자주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다. 마네가 죽고 난 뒤 1889년 경제적으로 곤란한 마네 부인을 돕기 위해 모네와 드가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기부금을 모아 미국인 수집자에 팔려 나갈 ‘올랭피아’를 구입해 정부에 기증했다. 

모네는 센 강의 보트를 아틀리에로 만든 이유는 현장에서의 인상을 즉시 화폭에 담고 싶은 예술가로서 창의성의 발로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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