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억2280만시간. 올해 상반기 전 세계 시청자가 넷플릭스 ‘더 글로리’ 파트1을 감상한 시간이다. 같은 기간 넷플릭스 전체 영화·TV시리즈 중 세 번째로 시청시간이 길다.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문동은(송혜교)이 성인이 돼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 법으로 치르지 못한 죗값을 피해자가 받아내자 시청자들은 통쾌해했다. SBS ‘모범택시2’도 비슷한 사례다. 피해자를 대신해 가해자를 엄벌하는 택시기사 김두기(이제훈)에 안방극장은 열광했다. 시청률은 21%까지 올랐다. 올해 방영된 미니시리즈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이다.
개인이 악을 처단하는 사적 제재 서사는 올해 유독 인기였다. ‘더 글로리’와 ‘모범택시2’ 말고도 경찰대 재학생이 흉악범을 응징하는 디즈니+ ‘비질란테’와 다수결로 흉악범 사형 여부를 결정하는 SBS ‘국민사형투표’가 시청자를 찾았다. 극장에선 강력계 형사 마석도(마동석)가 주먹으로 범죄자를 제압하는 영화 ‘범죄도시3’(감독 이창용)가 1000만 관객을 모았다. 아주 새로운 흐름은 아니다. 10여년 전에도 딸을 잃은 경찰이 유력 대선후보를 추적하는 드라마(SBS ‘추적자’)가 인기였다.
다만 올해는 드라마 속 사적 제재가 현실로 옮겨왔다는 점에서 위험신호가 감지된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압구정 롤스로이스 사건’ 등 강력범죄 피의자 신상은 경찰이 아닌 유튜버에 의해 공개됐다. 악성 민원에 시달리던 초등학교 교사가 사망하자 민원 가해자로 지목된 학부모의 신상도 온라인에 공개됐다. 이들이 운영하는 사업장 중 두 곳은 문을 닫았다. 한쪽은 ‘사이다’라며 통쾌해했다. 여론재판을 회의적으로 보는 쪽도 있다. 법을 대신한 사적 제재의 적절성 논의가 이제 현실에서도 시작된 셈이다.
사적 제재를 다룬 창작자들은 고민이 더 커졌다. 복수를 곧 정의 실현으로 보던 부등식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비질란테’를 연출한 최정열 감독은 이달 초 쿠키뉴스와 인터뷰에서 “주인공의 자경단 활동이 마냥 통쾌하게 끝나지 않는다. 이게 옳은 일일까. 해도 되는 일일까. 이런(사적 제재) 이야기가 재밌게 느껴진다면 우리 시대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길 바라며 작품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더 글로리’를 집필한 김은숙 작가도 “복수의 과정에서 문동은도 가해자가 된다”고 짚되, 등장인물 입을 빌려 ‘피해자는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아야 원점에 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사적 제재 서사는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불신에서 출발했으나 최근에는 ‘사이다 서사’와 ‘고구마 서사’로 양분되는 모양새”라고 짚었다. 잔혹한 응징이 곧 ‘사이다’로, ‘사이다’가 곧 정의 실현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진단이다. 정 평론가는 “이야기가 얼마나 통쾌한가에 집중하다 보면 자극성을 좇을 가능성도 커져 지나치게 잔혹한 묘사 등도 나온다”며 “피로감이 쌓인 시청자들이 반대로 잔잔하고 힐링을 주는 작품들을 찾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