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21)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21)

혁신적 화풍의 창시, ‘피리 부는 소년’

기사승인 2024-07-22 16:06:25
에두아르 마네, 자화상, 1878~79, 캔버스에 유채, 83x67cm, 개인 소장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마네와 드가의 특별전'이 2023년 3월 28일부터 7월 23일까지 열렸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초상화가 우리를 맞아주고 있었다. 마네는 사진작가들과 동료 화가들을 위해 기꺼이 포즈를 취했음에도, 오직 하나의 자화상만 있다.

1870년대 말의 이 그림에서 그는 검은 펠트 모자와 노란 재킷을 입은 자신을 예술가이자 파리의 멋쟁이로 묘사했다.​​ 
에두아르 마네, 마네 부모의 초상, 1860, 캔버스에 유채, 110x90cm, 오르세 미술관

마네는 프랑스의 부르주아 명문가 출신의 고집이 센 장남이었다. 그의 아버지 오귀스트 마네(Auguste Manet)는 법무부 비서실장과 고위급 판사를 역임한 법관이었다. 어머니는 프랑스에 파견된 스웨덴 외교관의 딸이고, 대부가 스웨덴 왕위에 오른 칼 14세 요한(Karl XIV Johan)이었다.

어릴 적부터 외삼촌은 마네를 루브르 박물관에 자주 데려가고 데생을 가르쳐 주기도 하며 예술의 길을 열망하는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마네 부모는 장남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법대에 진학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파리의 유명한 롤린고등학교에 다니던 마네는 공부에 소질이 없었는지 법대를 두 번이나 떨어졌다. 고등학교 때 생활기록부 따르면 “전적으로 부적격한”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차선책으로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려 도전했으나 이 역시 두 번이나 실패했다. 

그는 16세에 6개월 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훈련선을 타고 다녀 왔다. 브라질에서 돌아온 뒤 그는 마침내 가족들에게 화가가 되겠다는 포부를 확실히 말했다. 법대와 해사에 각각 두 번씩 낙방하니 이젠 아버지도 아들이 화가의 길을 가겠다는 결정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1850년부터 진보적인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의 화실에서 6년간 정식으로 훈련을 받게 된다.

쿠튀르는 낡은 관습을 끊어내려 밝은 색감과 질감을 그림에 도입한 화가였다. 화가 수업을 받을 때, 그는 루브르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전통문화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원작을 직접 보고 조형기법을 익히기 위해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에두아르 마네, 스페인 가수(기타 치는 스페인인), 1860, 캔버스에 유채, 147.3x114.3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화가로서 충분히 역량을 갖춘 마네는 27살이 되던 해부터 살롱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했다. 1861년 살롱에 출품한 이 작품은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벨라스케스와 고야처럼 짙은 회색의 어두운 배경에 검정색을 주조로 사용하여 스페인 회화의 전통을 계승했다.

그러나 기존 그림처럼 종교나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 아닌 평범한 스페인 가수가 불편한 자세로 나무 벤치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투우사 옷을 입고 흰 신발에 묻은 때는 그의 삶도 녹록치 않음을 보여준다. 

그는 뚜렷한 윤곽선으로 가수를 묘사했고, 급격한 명암의 전환으로 흰 스카프와 블라우스는 빛을 받는 얼굴을 조명판처럼 밝게 만들었다. 무채색이 주조이지만 액센트를 주기위해 기타줄과 항아리에 주황색을 사용했다. 그렇게 전통적인 화법을 구사하였기에 그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보수와 진보 양진영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신화나 성경에서 주제를 가져온 기존의 아카데미즘 화풍에서 벗어나 동시대의 파리인의 삶을 주제로 삼았다는 점은 앞으로 벌어질 마네의 변모를 예고해 준다. 이후 마네는10년간 매년 살롱 출품했다. 

예술의 도시 파리는 세계적이며 세련되고 다면적인 도시였고, 마네는 파리지앵이다. 도회풍의 세련됨을 간직한 마네는 본능적으로 새로운 접근방식을 통해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 했다.

1850년대 쿠르베는 사실주의를 주창하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화풍에 반기를 들었다. 거기에 마네는 자신의 장난기 넘치며 규칙을 무시하는 솔직함을 결합하였다. 

마네는 왼손잡이 기타리스트에게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주어 규칙을 무시하였고 이렇게 솔직히 말했다.

“그냥 이런 거예요. 저는 기타 머리 부분을 한 번에 그렸어요. 두 시간 동안 작업한 뒤에 조그만 검정 거울로 그림을 비춰봤고 만족했습니다. 더이상 붓질을 보태지 않았죠.”

이처럼 그는 쿠르베가 그러했 듯이 사실주의를 가장한 사실주의를 표방한 것이다.

에두아르 마네, 피리 부는 소년, 1866, 캔버스에 유채, 161×97cm, 오르세 미술관​

제국주의 프랑스는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자 전쟁 고아들이 늘어났다.

따라서 마네의 친구 르존슨 사령관의 부대에도 전령이나 왕실친위대 곡예단원으로 고아들을 수용하였다. 피리를 부는 고아 소년 페피니에르를 그린 이 작품을 보면 빨간색, 검정색, 노란색, 흰색 등 강렬한 색감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위 그림은 기존에 사용되지 않았던 테두리를 그려 넣고, 균일한 원색을 사용하여 인물과 배경을 구분한 마네의 새로운 화풍을 완벽히 나타내고 있기에 의미가 있다. 마네가 이와 같은 새로운 화풍을 창안하기 전까지는 아래와 같은 전통적 화법이 지배적이었다. 

첫째, 키아로스쿠르(Chiaroscuro)이다. 빛과 어둠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키아로스쿠로’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해 이차원 평면의 그림 위에 삼차원 물체가 지닌 입체감과 가소성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키아로스쿠로 기법에는 더 진하고 검은 색을 쓰는 것이 아니라, 검은 색 안료를 사용해 색의 어두움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포함된다. 다빈치는 삼차원의 인체나 사물의 양감을 표현하기 위해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 부피감을 지닌 물체를 이차원 평면 위에 실감나게 표현했고 그것이 이후 전통 화법으로 계승되었다. 

​둘째, 모델링(Modeling)이다. 인체나 사물에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해 색상의 차이나 명암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팔의 양쪽 부분은 진하게, 가운데 부분은 흐리게 처리하면 도톰한 팔의 입체감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음영을 통해 입체감을 부여하는 방식이 모델링이다. 

셋째, 원근법이다. 원근법과 키아로스쿠로 그리고 모델링 등 3가지 회화의 원리를 이용하여 신화와 종교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그리고, 또 거기에 도덕적인 교훈을 담아 실제와 같이 재현하는 환영주의(幻影主義)가 전통 회화의 목표였다.

르네상스 이래 창안된 회화의 원리는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고 300년 동안 마네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나 카메라의 발명과 일본 목판화 우끼요에로 인해 전통화법에 대한 반항과 의문이 제기되었다. 

'피리 부는 소년'의 입체감과 가소성을 표현하는 옷 주름도 바지에 검정선으로 몇 줄만 그렸을 뿐이다. ‘지체없이 흰색에서 검정으로 넘어가는…’라는 졸라의 표현처럼 그라데이션(gradation, 변화)이나 농담(濃淡)의 차이 없이 바로 다른 색채로 넘어가는 마네의 화법을 그대로 보여준다.

원색의 집합체인 이 그림은 당연히 살롱에서 거부되었다. 신고전주의 화가 다비드가 세운 초상화의 기치를 마네가 완벽히 무시하였기에 파리의 비평가와 대중들은 화를 냈다. 마네의 가치를 인정한 보들레르, 에밀 졸라, 말라르메 등이 이에 대해 변호했다. 

전통적으로 그림은 관객의 영혼을 울리며 감정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런 답습을 거부했던 마네의 아무 것도 전달하지 않는 그림이 낯설기에 그들은 화를 낸 것이다.

마네는 스토리가 없는 그림을 그려 읽어야 하는 그림에서 보기만 하는 그림으로 대체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자세는 무엇을 의미하지도 않고, 몸짓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프랑스 인문학자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마네가 회화의 혁명을 달성한 게 아니라 예술의 본질, 즉 라스코 동굴 회화에서 시작되었던 예술을 본질로 귀환시켰다고 말했다.

미학자 박정자는 “예술은 합리적 이론이나 앎으로 설명되는 세계가 아니라 그냥 뭔지 알 수 없는 황홀한 법열의 순간일 뿐”이라고 정의했다. 우리가 예술 작품을 보며 느껴지는 개인적 감정이 어느 학자의 이론보다 소중하다는 이야기다. 

에두아르 마네, 에밀 졸라의 초상, 1868,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왼편에 새가 그려진 금빛 병풍과 사무라이가 있는 우끼요에를 배경으로 그린 졸라의 초상은 마네가 얼마나 일본 문화에 심취했는지 보여준다. 자신을 옹호하는 졸라에 대한 고마움과 '화가의 역사'를 펼치고 있는 모습에서 자신이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는 확신을 담고 있다. 

마네는 ‘그림을 위한 그림’을 시도하며, 19세기 ‘예술을 위한 예술’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이후 그는 새로운 시도를 원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파리에서 19세기 후반 25년 동안 예술적인 거물로 ‘인상파의 아버지’가 되었다.

또한 그는 작가인 에밀 졸라, 말라르메를 비롯한 언론인들의 지적 동반자였다. 전통의 답습을 거부했던 반항아 마네는 요즘으로 말하면 혁신(Innovation)을 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위대한 예술가이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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