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벨기에의 면적은 대한민국의 1/3 정도이지만 유럽의 작은 거인이라 불린다.
겐트(Gent)는 수도 브뤼셀에서 북서쪽으로50 km 떨어진 도시로 플라망어로 헨트라고 한다. 겐트는 ‘합류점’이라는 뜻으로, 중세의 교통로인 물줄기가 도심까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물자를 실어 나르기에 편리하여 최적의 상업도시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 북부에서 발원한 두 강이 네덜란드를 지나 북해로 흐른다. 겐트는 해발고도가 낮은 평야지대에 있고, 바다에서 20 km 떨어진 내륙 도시지만 운하를 통해 북해로 접근할 수 있어 항구와 대학으로 유명하다.
겐트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영국에서 양털을 수입하여 가공하는 모직물 유통 거점으로 발달하여, 이탈리아와 무역을 통해 활발히 교류하였다. 지금도 중세 도시의 원형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서 인접한 브뤼헤(Bruges)와 함께 관광지로 유명하다. 13세기에는 6만의 인구가 밀집하여 파리의 뒤를 잇는 북유럽 최대의 도시였다.
중세의 가장 큰 특징은 봉건제로, 국왕이 가난하여 재정이 부족하고 보병이 무력화되었기 때문에 생긴 제도였다.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이 국왕에게 군사력을 제공하고, 봉토를 허가 받아 예속된 농민들의 생산물을 착취하였다.
9세기와 10세기에 바이킹족, 사라센족, 마자르족 등이 유럽을 침공하자 허약한 군주제는 붕괴되었다. 그래서 서유럽의 왕들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못하였고, 9세기에서 12세기까지는 귀족들이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중세 후기에 들면서 장창, 석궁, 장궁으로 무장한 보병이 기병보다 힘을 얻게 되었고, 신흥상인 계급인 부르주아가 국왕에게 재정을 지원하며 강력한 군주가 탄생했다.
이런 흐름 속에 중세 말 14, 15세기 서유럽에 절대왕정 국가가 수립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프랑스 왕 샤를 5세, 6세, 7세의 왕권이 허약하여 절대왕정은 고사하고 국토 내에 ‘부르고뉴(Bourgogne)’라는 독립된 공국(公國)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프랑스 내에서 부르고뉴 공작(公爵))의 다스리는 세력이 막강했다.
부르고뉴 공국 시대인1274년 폐쇄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자리에 89 m의 첨탑이 있는 큰 고딕 양식의 성 요한 대성당이 세워졌다.
후일 이 성당은 성 바봉 대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곳이 미술사적으로 유명하고 가치 있는 이유는 후베르트(Hubert)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5~1441) 형제가 1432년경에 완성한 플랑드르 르네상스 최대의 문화유산인 제단화(祭壇畵) '어린 양에 대한 경배'가 소장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보기 위해 겐트를 방문하게 되니 그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얀 반 에이크는 존경받는 화가일 뿐만 아니라 부르고뉴 공국 필립 3세의 외교사절로 활동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의 작가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14세기와 15세기를 다룬 저서 <중세의 가을, 1919>에서 프랑스와 부르고뉴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는 중세 후기 ‘쇠락해지는 시대’라는 의미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나아가는 시대’라는 의미에서 ‘중세의 가을’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반 에이크 형제와 그 후계자들의 그림들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이 활동했던 시대의 맥락을 잘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반 에이크는 겐트의 성 바봉 대성당의 제단화(祭壇畵) '어린 양에 대한 경배'를 스케치하다 죽은 형을 이어 무려 8년 동안 이 작품에 심혈을 기울여 1432년에 완성하였다.
본래 성 요한 대성당이었으나 1559년 겐트 교구가 설립되며 성 바봉 대성당으로 바뀌었다. 고딕 양식의 특징인 첨두 궁륭(Pointed vault )과 주요 리브 중간에 보조 리브를 두며 별 모양과 꽃 모양의 고딕 특유의 천정이 나타난다. 높은 천정을 받치며 밝은 첨두 아치(Pointed arch)로 된 트레이서리(Tracery, 장식격자)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성 바봉 대성당에는 에스파냐의 카를 5세 세례 기념단이 있다. 이는1500년 카를 5세가 부르고뉴 공국의 필리프 공작과 스페인의 후아나 공주의 장남으로 겐트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단화를 보러 가는 길에 오토 반 벤과 루벤스의 스승과 제자의 작품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이 날은 겐트 제단화(Ghent Altarpiece)를 본다는 설렘에 사진이 핀트도 안 맞고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오랜 성당의 역사만큼 많은 그림들이 있었지만, 그 하나는 루벤스가 그린 성 바봉 대성당 유래에 대한 작품으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플랑드르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성 바봉(Saint Bavo, 622~659)의 생애를 화폭에 담았다. 그림은 문맹률이 높았던 시대에 자선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홍보 미디어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2000~3000여 작품을 그렸다. 루벤스는 이 작품을 자신의 최고 작이라 여겼다.
장방형 캔버스의 아래부터 지그재그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성 바봉은 젊은 시절 군인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이후 성인 아르망의 부와 명예는 헛된 것이라는 설교에 감화되었다.
그는 부인의 동의를 얻어 전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주교와 수도원장 앞에서 회개하였다. 왼편 붉은 드레스의 부인과 딸 그리고 얼굴만 보이는 하녀의 놀라는 모습이 무척 극적이다.
상단은 두 아들과 하인을 거느린 성 바봉이 가난한 사람과 같이 입교하는 장면으로 가장 아름다운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또 하나의 작품은 네덜란드 화가 오토 판 벤(Otto van Veen, 1556~1629)의 작품이다. 그는 루벤스의 스승으로 나에겐 더 의미가 있다. 안트베르펜에서 활약한 로마로 유학을 다녀온 가장 유명한 화가였다.
그러나 오토 판 벤이나 루벤스는 반 에이크보다 거의 200년 뒤에 사망한 화가들로, 이 그림을 여기서 감상하는 이유는 이후에 만날 반 에이크의 뛰어난 걸작과 비교하기 위해서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문화부장관인 앙드레 말로는 <상상의 박물관, 1947>에서 “제우스상이 신전에 놓여 있을 때는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지만, 박물관에 들어오는 순간 미적 감상의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또한 독일 문예 이론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성(聖)스러운 ‘예배가치’를 잃고 박물관에서 예술작품이 속(俗)된 ‘전시가치’로 추락하게 된다고 간파했다.
16세기에 완공된 성 바봉 대성당에서 비정형의 팬던트로 중세에 현대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크리스탈에 부딪히며 돌로 지어진 성당 벽에 삼중주를 빚어낸다.
고딕 성당은 그 도시 시민들의 긍지를 높이는 상징이었다. 대성당 건축에는 당대 최고의 건축과 과학 그리고 예술이 집약되며, 그 시대 정신을 증언한다. 성 바봉 대성당이 지어지기까지 겐트의 경제력와 부르고뉴 공국의 안정된 정치가 뒷받침되었다. 대성당은 모여서 예배를 보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설교하는 수많은 장식물로 치장된, 눈으로 보는 성서이다.
오랜 시간 방대한 공사가 진행되며 고딕 건축을 바탕으로 반종교개혁을 위한 웅장한 바로크식 제단과 섬세한 로코코식 설교단 그리고 고아한 크리스탈 팬던트 등 예술 양식의 다양한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