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은 없었다. 국민의힘이 제22대 총선에서 참담한 성적표를 받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지역구 의석만으로 단독 과반을 달성하며 압승을 거뒀다. 여권의 ‘구원투수’로 화려하게 등판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겐 악몽 같은 결과다. 거센 민심 앞엔 백약도 무효했다.
정권 심판론과 거야 심판론이 부딪혔던 이번 총선 패배의 결정적 원인은 ‘용산발(發) 리스크’라는 게 중론이다. 본격적인 총선 국면이 시작된 이후 여당에 치명타를 입힌 사건은 대부분 용산에서 나왔다. 윤 대통령의 ‘마이웨이’식 불통 리더십은 이번 총선에서 여당의 발목을 잡는 구조적 족쇄였다. 지지층마저 등 돌리게 만들며 최악의 상황을 자초했다. 이른바 ‘조용한 공천’으로 선거전 초반 우세를 보이던 여당은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출국, 의정갈등 등 악재에 야권에 기세를 뺏겼다.
① 강서구 보궐선거 참패…경고음 울렸지만
민주당의 ‘총선 압승’ 징조는 지난해 10월 강서구처장 보궐선거부터 시작됐다. 국민의힘은 강서구청장 보선 때 무공천 원칙을 내세웠지만, 용산은 무리하게 사면·복권한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 재공천을 강행했다. 민주당은 전 정부의 경찰청 차장 출신인 진교훈 후보를 전략공천했다. 승리는 진교훈 후보의 몫이었다. 두 후보 간 표차는 17.15%p에 달했다. 적은 표차로 패배할 경우, 내세울 수 있는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논리도 힘을 잃었다.
정치권에서는 ‘보궐선거 원인 제공 시 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국민의힘 당규를 위배하면서까지 공천을 밀어붙인 대통령실과 여당 지도부 결정이 공감대를 얻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국민의힘이 선거운동 과정에서 김태우 후보를 ‘윤심’(尹心) 후보라고 내세운 점에서 뼈아픈 대목이다. 김기현 대표는 같은 해 12월 대표직에서 물러나며 선거 패배의 책임을 떠안았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총선 전초전’으로 불린 만큼 민주당으로선 상징적 의미가 컸다.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 연패의 늪에서 벗어나며 총선 승리를 위한 발판을 다졌다.
② 김건희 여사 ‘명품백 논란’과 1차 윤한 갈등
윤한(윤석열·한동훈) 갈등은 총선 판세를 바꾼 대표적인 변곡점으로 꼽힌다. 야권은 지난해 말부터 윤 대통령의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논란을 집중적으로 띄웠다. 윤 대통령은 김 여사에 논란에 대한 유감 표명 대신 KBS와 대담을 통해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게 문제”라는 미지근한 입장을 내는 데 그쳤다. 명품백 수수의 적절성, 후속 조치도 언급하지 않아 충실한 해명이 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김경율 국민의힘 비대위원은 김 여사를 ‘마리 앙투아네트’에 빗대며 사과를 촉구했다. 한 위원장도 “국민 눈높이”에 맞는 입장 표명을 요구할 때도 윤 대통령은 역으로 한 위원장 사퇴를 압박하며 맞섰다. 표면상 명분은 김경율 비대위원의 서울 마포을 사천 논란이었지만 명품백 대응이 결정적 도화선으로 풀이됐다. 한 위원장이 사퇴 요구를 거절하면서 1차 윤한 갈등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양측은 같은 달 23일 충남 서천시장 화재 현장에서 극적으로 ‘화해무드’를 보였다. 한 위원장은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갈등을 봉합했지만, 수직적 당정관계에 대한 우려는 가시지 않았다.
③ 이종섭·황상무 악재와 2차 윤·한 갈등
민심은 황상무 전 시민사회수석의 ‘언론인 회칼 테러’ 협박 발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도피성 주 호주대사 임명으로 급속히 악화했다. 한 위원장은 3월17일 이들의 거취를 결단하라고 요구했지만, 대통령실이 이를 일축하면서 ‘2차 윤한 갈등’이 불거졌다. 총선 공멸 위기가 대두되자 대통령실은 사흘 뒤 황 수석의 사퇴와 이 대사의 귀국을 발표했고 결국 이 대사도 사퇴했다. 여권 내부에선 거취 결단 시기가 너무 늦었단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한번 내린 결정을 좀처럼 바꾸지 않는 윤 대통령 특유의 ‘강골 기질’이 약점이다. 원칙을 고수하며 버티고, 여론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고 나서야 용산이 수습하는 구조”라는 지적했다.
④ 출구 없는 의정 갈등
의대 정원 2000명 확대를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 간 갈등은 막판 변수로 작용했다. 초반엔 정부의 확고한 증원 방침으로 지지를 얻었지만, 의료 대란이 장기화하자 국민들의 피로도는 커졌다. 한동훈 위원장은 “숫자에 매몰될 문제는 아니다”며 대통령실에 전향적인 입장 전환을 요청했지만, 외려 윤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전문의 카르텔을 지적하며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정부의 일방통행식 정책은 필수의료 공백 상황을 낳고, 윤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를 더욱 강화했다. 총선 전까지 풀리지 않은 의정 갈등은 결국 여당에 악재로 작용했다.
⑤ 尹 한마디에 시작된 ‘875원’ 대파 파동
이번 총선에서 표심을 뒤흔든 단어로 ‘대파’를 꼽는 이가 많다. 발단은 지난달 18일 서울 서초구 농협하나로마트에서 현장 물가를 살피던 윤 대통령의 “그래도 (대파 한 단에) 875원이면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된다”는 말실수였다. 윤 대통령은 “다른 데서는 이렇게 싸게 사기 어려울 것 아니냐”고 부연했지만, 야당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세를 퍼부었다. 여기에 이수정 국민의힘 수원정 후보의 ‘대파 한 뿌리 가격’ 발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대파 금지령’ 등 논란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본투표일까지 ‘대파 파동’이 이어졌다.
선거 직전 정권 심판 구도를 굳히는 핵심은 경제와 물가였다. 지난 3월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3.1%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과일·채소값 폭등세가 계속되면서 서민들의 고충은 커졌다.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3월4주 윤 대통령 직무 수행 평가 관련 부정 응답률이 58%였고, 그 부정 평가 이유 1위가 바로 ‘경제·민생·물가’(23%)였다. 고물가로 가계 경제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대파 발언이 정서적 임계점을 건드렸다는 여론이 적지 않다.
이번 총선 압승으로 민주당은 국회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됐다. 민주당은 지역구 161석과 비례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은 14석을 확보했다. 조국혁신당 12석과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 등을 합하면 범야권의 의석수는 모두 189석이다. 2000년 16대 총선(새천년민주당 115석, 한나라당 133석) 이후 16년 만에 여소야대 지형이 형성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여소야대(與小野大) 한계 속 조기 레임덕에 빠질 가능성이 커졌다. 총선을 통해 원내 1당 지위를 회복하고, 임기 중·후반의 국정 운영 동력을 확보한다는 당초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단독 과반 의석을 확보한 민주당은 대통령을 제외한 국무위원 탄핵소추, 본회의 법안, 국무총리·헌법재판관·대법관 임명 동의안 등을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다. 범야권 의석수는 180석 이상으로 국회선진화법 무력화, 쟁점 법안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단독 추진, 필리버스터(합법적 무제한 토론) 24시간 내 강제종료도 가능해졌다.
윤석열 정부가 국민에게 약속한 의료·교육·노동·연금 등 4대 개혁을 포함한 120대 국정과제 추진에도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여당이 총선 과정에서 약속했던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서울 편입·경기 분도 원샷법, 공시지가 현실화 계획 중단도 멀어졌다.
이번 총선 참패와 관련해 윤 대통령은 본격적인 인적 쇄신, 야당과의 소통 강화를 천명했다. 이관섭 비서실장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11일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고 경제와 민생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야당과 긴밀한 협조, 소통에 나서겠다는 것을 의미하냐는 질문에 “그렇게 해석하셔도 좋다”고 답했다. 그동안 야당이 요구해왔던 이재명 대표와의 영수회담 가능성까지 열어놓은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최은희 기자 joy@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