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35)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35)

<플란더스의 개> 넬로가 사랑한 루벤스와 그의 도시 안트베르펜

기사승인 2024-04-29 10:14:15
안트베르펜 위치도(출처:Naver)

벨기에 안트베르펜은 스헬더강의 좌우로 형성된 도시이다. 

안트베르펜의 노트르담은 ‘우리들의 성모(Cathedral of Our Lady)’라는 뜻으로 성모 대성당이라 불리는 로마 가톨릭 대성당이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필자는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십자가를 세움>, <십자가에서 내림>, <성모 승천>, <그리스도의 부활> 등 그의 대표작을 보기 위해서 그곳을 찾았다.

성당 앞의 글로브 마켓(Glove Market)이란 삼각형 모양의 광장 

우리는 주변 건물들의 창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각층마다 창문이 폭은 같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세로 길이가 짧아진다. 북극 가까이 위치한 북유럽의 지리적 여건 때문에 안트베르펜의 경우 12월 중순에는 오후 네 시 반이 되면 어두워지고, 해가 오전 8시 40분에 뜬다. 

하루 중 낮 시간이 8시간이 채 안된다. 또한 맑게 갠 날이 많지 않기에 빛에 대한 욕구가 중요한 건축적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이런 창이 북유럽 건축의 특징이 되었다.​​ 

안트베르펜은 위도가 51도이므로, 일층에서도 햇볕을 받기 위해 창호를 세로로 길게 만들었다. 또한 미닫이창보다 위아래로 올리거나 완전히 오픈할 수 있는 구조가 햇빛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창문을 열 때는 대걸레 자루처럼 긴 막대 끝에 갈고리를 걸어 사용한다. 전통 한옥에서 여름에 방문을 처마에 완전히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o Rubens)의 동상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그로엔플라츠 광장은 와플이 유명하다.

성당을 보고 난 뒤 지친 상태로, 메뉴에서 가장 토핑이 담백한 바나나 와플을 주문했다. 

벨기에는 네덜란드에서 가져온 홍합으로 만든 홍합탕, 쇠기름이나 오리기름을 넣은 감자 튀김이 가장 대표적일 정도로 소박한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맥주가 아주 유명하다. 

플란더스의 개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내가 루벤스라는 화가에 대해 알게 된 경로는 애니메이션 <플란더스의 개>였다. 

원작은 1872년에 나온 영국 작가 마리아 루이즈 라메(Maria Louise Rame)가 ‘위다(Ouida)’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소설이다. 그리하여 제목이 플랑드르의 영어인 <플란더스의 개>이다. 

광장에는 루벤스의 동상이 서 있을 정도로 플랑드르에서는 화가들이 부와 명예를 얻었다. 

그래서 <플란더스의 개>의 주인공 넬로도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 특히 일본과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고, 넬로가 파트라슈와 함께 성당에서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림> 앞에서 얼어 죽은 모습의 조각이 보도블록 이불을 덮고 있다. 

마침내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그림을 보았기 때문인지 그들의 잠든 표정은 무척 평온하다. 

안트베르펜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가까이에서 찍었더니 첨탑이 잘렸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기존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 위에 1352년 얀(Jan)과 페테르 아펠만스(Pieter Appelmans)부자가 공사를 시작한 후, 1521년, 170년만에 고딕 양식으로 완공되었다. 

성당 건축에 동원된 석공들의 조각을 귀퉁이에서 발견했다. 

수 백 년 동안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한 이름 없는 석공들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 청동상들은 레오폴드 3세가 증축할 당시 페터와 얀 아펠만스 부자를 기념하기 위한 엑스트라였다 

이 고딕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첨탑은 그 높이가 123m로, 1999년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구도심에서는 첨탑의 높이를 기준으로 고도를 제한하였다. 

그러나 원래 하나 더 있어야 하지만 지붕 높이의 문제로 더 이상 공사를 진척하지 못했다. 사진으로 봐도 다른 고딕 건축과는 달리 좌우 균형 맞지 않는 외관을 볼 수 있다. 

안트베르펜의 노트르담 대성당

설계도 원안에는 123m의 탑을 두 개를 정면에 세우려고 했으나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은 1518년에 세워진 북쪽 탑 하나이다. ​​ 

당시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가장 높았다. 그래서 중세 때는 '사탄이 안트베르펜을 지나가다가 대성당의 첨탑에 긁혔다'라는 이야기가 회자될 만큼 우아하고 날렵한 외관을 가졌다. ​​

안트베르펜 브라보 상 분수 뒤로 보이는 노트르담 대성당 첨탑

고대 로마 시대에 안티고누스(Antigonus)란 거인이 사람들의 손목을 자르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러자 로마의 장군 브라보(Silvius Brabo)가 안티고누스를 물리치고 그의 손목을 잘라내서 스헬더 강에 던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분수대는 브라보가 손목을 던지는 동작을 표현한 조각상이다. 이 '손목을 던지다'(Hantwerpen)란 단어가 묵음화 등을 거쳐 안트베르펜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 빈미술사 박물관 

이 성당 내부는 전형적인 북유럽 고딕 양식이며, 안트베르펜의 랜드마크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벨기에의 겐트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이곳에 대한 애착으로 기존 성당의 5배로 증축하기 위하여 주춧돌을 놓았으나 완성되지는 못했다. 

1533년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성당은 플랑드르 르네상스 시기에 재건되면서 고딕과 고전 양식이 조화된 건축을 낳았다. ​​

안트베르펜 노트르담 대성당의 팀파늄

‘팀파늄(tympanum)’이라 불리는 현관의 상인방(上引枋, lintel)에는 성인들과 최후의 심판을 받는 장면이 주로 새겨져 있다.

지상에서의 삶의 목표인 천국과 지옥 그리고 중세 최고의 발명인 연옥에 관한 가르침이 성당의 현관에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성당을 장식하는 조각들은 기독교 교리를 명확하게 이미지화해야 한다. ​​

고전 양식의 예술가들은 중세로 인해 단절되었던 옷을 입은 육체를 묘사하는 방식을 다시 되돌리고자 했다. 

아마 그들은 북유럽에서 간간이 찾아볼 수 있는 로마의 묘석이나 개선문 같은 이교도의 석조물에서 이를 찾았을 것이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는 콘트라포스트(Contraposto)의 S자 모양으로 휘어진 몸을 따라 흘러내리는 옷자락과 자애로운 시선 그리고 발과 손을 감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조각들은 90%이상이 문맹자였던 시대였기에 성직자들의 설교보다 더 강력하게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중세 말 프랑스 시인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은 <어머니에게 바치는 시>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저는 가난하고 늙은 여자입니다.

아주 무식해서 읽을 줄도 모릅니다.

그들은 우리 마을 성당에서

하프가 울려 퍼지는 천국과

저주받은 영혼들을 끓는 물에 튀기는 지옥의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는 나에게 기쁨을 주지만

다른 하나는 두려움을 줍니다. 

중세에 기독교는 ‘최후의 심판’을 하는 두려운 존재인 하느님을 신도들에게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제사장과 살렘의 왕 멜기세덱

왼쪽은 구약 성경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라함을 맞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가져온' 살렘의 왕 멜기세덱이다. 

그래서 그는 중세 신학에서 성사(聖事)를 집전하는 신부들의 모델로 간주되었으며, 성직자들의 성찬배를 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

베드로와 야고보

팀파늄의 왼쪽에는 천국을 상징하는 집과 열쇠를 든 초대 교황 베드로의 조각상이 있고, 그의 얼굴에는 인자함이 흐른다. 오른쪽의 야고보는 순교 형구인 칼과 돈주머니, 조개껍질를 들고 묘사된다.

이처럼 중세 대성당에 모여 있는 조각상들은 거의 다 특유의 상징을 가진 채로 묘사되었기에 신자들은 그 의미와 신탁을 이해하고 묵상할 수 있었다. 

야고보의 발 밑에서 지팡이에 의해 제지당하고 있는 악마의 모습이 유머러스하다. 당시에는 조각이 홀로 서 있을 만큼 균형을 이루지 못해 벽감에 기대어 있다.​​ 

성당 내부 제단

제단에는 루벤스의 <성모 승천>이 자리하고, 흰색 벽으로 단정하고 우아하다. 

프랑스 철학자 라깡에 따르면, 건축물은 삶은 편리를 보장해주는 실용적인 기능을 넘어서 신경증적인 기능을 수행하는데, 동서양의 신전과 성당 그리고 왕궁의 돔과 궁륭으로 건물 내부에 가시적인 ‘성스러운 공백’을 만들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황제로 즉위한 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치하였다. 그리고 루벤스의 <십자가의 세움>, <십자가에서 내림>, <성모 승천>을 탈취하여 프랑스로 가져갔다.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20년 만에 세 작품이 돌아오게 되니, 그때 안트베르펜 도시 전체는 큰 축제를 열었다. 

‘예술 작품에도 운명이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유럽 및 이집트의 주요 문화유산에 나폴레옹은 빠지지 않고 관여했다. 2023년에 영국에서 제작된 프랑스의 영웅을 다룬 영화 <나폴레옹>을 보며, 스스로 황제에 올라 세상을 정복했지만 아무것도 갖지 못한 그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의 100일 천하는 벨기에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여 막을 내리고, 아프리카에서 1400km 떨어진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다. 나폴레옹의 독살설이 있어, 그의 머리카락을 분석하였다.

‘모나리자’를 화장실에 걸었던 전성기가 그리웠기 때문인지, 황제를 상징하는 귀한 보라색으로 온 집안을 꾸몄다. 

그리하여 그는 보라색에 함유된 비소 중독으로 6년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내가 누군인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억의 흔적들이다. 나폴레옹은 운명 시 마지막으로 프랑스, 군대, 선봉 그리고 이혼한 아내 조세핀을 불렀다. 

나폴레옹은 죽었지만, 루벤스의 작품은 지금도 안트베르펜을 지키고 있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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