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퍼’ 박도현은 혜성처럼 등장했다. 박도현이 속한 그리핀은 2018년 서머에 승격한 지 단 한 시즌 만에 준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에서 2018 KeSPA컵 우승, 2019 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8강 성과를 이룬 박도현은 2020시즌을 마치고 중국 무대로 향했다.
중국에서 포스는 더 대단했다. 박도현은 LPL 데뷔 시즌에 ‘2021 스프링 정규시즌 MVP’와 ‘신인상’을 휩쓸었다. 서머에는 그토록 바라던 정규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백미는 2021 롤드컵이었다. 에드워드 게이밍(EDG) ‘에이스’로 나선 박도현은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아펠리오스 스킨 주인’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도 얻었다.
중국에서 거둔 성과를 뒤로하고 2023년 한화생명e스포츠(한화생명)로 전격 복귀한 박도현은 지난해 아쉽게 롤드컵 무대를 밟지 못했다. 팀원이 사생활 문제로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등 유독 불운한 한 해를 보냈다.
작년과 달리 올 시즌 한화생명은 ‘파괴전차’ 포스를 되찾았다. 비록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15승3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젠지e스포츠(젠지)·T1과 3강 구도를 형성했다. 그 중심에는 아직도 ‘바이퍼’가 있다. 쿠키뉴스는 지난 13일 일산 한화생명 캠프원에서 스프링을 마치고 다가오는 서머를 준비 중인 박도현을 만났다.
냉정한 ‘바이퍼’…“MSI 나갈만한 실력 아니었다”
한화생명은 올 시즌을 앞두고 젠지 핵심 3인방 ‘피넛’ 한왕호, ‘도란’ 최현준, ‘딜라이트’ 유환중을 품에 안았다. ‘바이퍼’ 박도현은 ‘제카’ 김건우와 함께 2년 연속 팀에 남아 우승을 노리게 됐다. 그리고 맞이한 스프링에서 한화생명은 훌륭한 정규리그 성적을 거뒀다. 박도현은 “워낙 잘하는 선수들이다. 그에 맞춰 열심히 하면 빠르게 시너지가 나올 거라 판단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좋은 호흡이 나왔다. 또 문제점도 찾았던 시즌”이라고 돌아봤다.
‘딜라이트’ 유환중과 호흡은 어땠을까. 박도현은 “시즌 내내 서로 잘 맞추려고 노력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모든 면에서 더 끌어올려야 할 것”이라면서 “교전을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비슷하다. 한타 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집요함이 인상적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박도현은 전체적 팀 합에 대해 “호흡을 맞추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자연스럽게 합을 맞춰나가기를 원했다”면서 “경기하면서 이기고 지다 보면 서로가 어떤 플레이를 하고 싶은지 잘 이해할 수 있다. 다 실력 있는 선수들이라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낀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사실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100점 만점으로 따지면 55점 정도다. 이상적인 팀 합을 유지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 놓치는 부분이 생기면서 틀어지는 경우도 많다”고 냉정히 평가했다.
한화생명은 단 3패(15승)만을 기록했음에도 최종 3위에 머물렀다.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MSI) 진출을 코앞에 두고 젠지와 T1에 연달아 패했다. 박도현은 “결승 진출전을 포함해 플레이오프가 다 기억에 남는다. 부족한 면이 있었다”면서 “굉장히 아쉬웠다. 한편으로는 MSI에 나갈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3위를 하면서) 많은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박도현은 발전한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 “결승 진출전에 올라가 오랜만에 큰 경기장에서 게임을 했다. 많은 팬분들 앞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분 좋았다”던 그는 “(팀적으로) 지난해보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고자 노력했다. 서로가 원하는 부분이 있으면 꼭 해결하고 넘어갔던 게 효과적이었다”고 상승세 비결을 밝혔다.
“라인 스왑,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팀들 색깔 정해진다”
이번 MSI 최대 화두는 바텀 듀오를 탑으로 올리고 탑을 하단으로 내리는 ‘라인 스왑’ 전략이었다. 조합상 초중반 약한 라인전을 넘기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라인 스왑은 상황에 따라 상대 허를 찌르기 위해 변칙적으로 구사하기도 한다. 스프링 막바지부터 활발하게 이뤄진 라인 스왑은 이제 하나의 메타가 됐다.
“고착화된 챔피언이 이유일 수 있다”고 분석한 박도현은 “라인 스왑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팀들의 색깔이나 논리가 정해진다”면서 “스왑 하지 않고 게임을 시작해도 상황에 따라 상대가, 혹은 우리가 라인 스왑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해야 한다. 하는 선수 입장에서는 힘들 수도 있다. 여러 플레이가 파생될 가능성도 많다”고 설명했다.
박도현은 서머에도 라인 스왑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서 “패치 하지 않는 이상, 못할 이유는 없다. 사이드 라인에서 초반 라인전 압박을 피하려고 하는 건데, 취할 이득이 있으면 할 것이다. 패치 방향을 봐야 한다”고 신중하게 말했다.
‘나는 바이퍼 원딜의 신’…박도현이 바라보는 ‘밈’
최근 LCK의 ‘밈제조기’는 단연 박도현이다. 이른바 ‘함바대전’이라 불리는, 지난해 함예진 아나운서와 아펠리오스 관련 인터뷰에서 박도현의 재밌는 면이 부각됐다. 인터뷰 이후 LCK와 구단 공식 유튜브, 롤 커뮤니티 등에는 ‘바이퍼 밈’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박도현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나서서 뭔가를 한 적이 없는데, 눈 떠보니 ‘밈제조기’가 됐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면, 사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면서 “스킨 승률 관련된 ‘아펠리오스 밈’은 내 노력의 증거다. 투쟁의 산물이라 생각한다”고 웃어 보였다.
한화생명 공식 유튜브는 ‘원딜의 신 바이퍼’라는 AI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이에 박도현은 “찾아보지 않았다. ‘피넛’ 한왕호가 보여줘서 봤다. 30초도 안 보고 껐다. 수위를 넘는 것 같으면 내가 직접 말해서 ‘컷’하겠다”고 유쾌하게 받아쳤다.
물론 어디까지나 ‘밈’일 뿐이다. 박도현은 “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하다. 다만 유튜브를 보는데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도 있더라. ‘또 다른 나인가’라고 생각했다.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안 해주셨으면 좋겠다. 지나치거나 허위 사실을 올리는 건 자제 부탁드린다”고 정중히 당부했다.
“LCK 우승, 영광스러운 일이자 목표”
어렸을 때부터 롤챔스(현 LCK)를 보며 프로게이머를 꿈꿨다던 박도현은 “게임 보는 것 자체가 너무 재밌었다. 그때는 롤을 달고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페이커’ 이상혁이 너무 멋있었다. 나를 놀라게 한 선수”라면서 “지난해 롤드컵 때, 기본 움직임이 자신감에 차 있더라. 그게 상대에게 먹힐 때 놀랐다. 어떻게 노력했을지 생각하게 된다”고 ‘기습 숭배’했다.
그렇게 꿈을 이룬 ‘프로게이머’ 박도현에게 가장 고마운 선수는 이번 MSI 파이널 MVP를 차지한 ‘리헨즈’ 손시우다. 박도현은 “많은 분들에게 도움받았다. 특히 그리핀 시절 같이했던 (손)시우 형에게 고맙다. 신인 때는 지금과 다른 마인드로 생활했다. 시우 형이 나를 선수로서,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줬다. 말은 안 하지만 항상 고맙다”고 연신 강조했다.
선한 성격답게 그는 평소 선행을 베풀기로 유명하다. 2019년부터 꾸준히 기부한 박도현은 지난해 대전 동구에 7000만원을 기탁하며, 대전 아너소사이어티(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105호 회원이 됐다.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되면서 숨기고자 했던 그동안의 선행이 알려지게 됐다.
박도현은 “사실 알려지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내 선행을 사람들이 보고 ‘나도 선의를 베풀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기쁠 것 같더라”면서 “이 생각을 가지고 꾸준히 기부했다. 모두가 서로를 좀 더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좋겠다”고 바랐다.
서머와 올 한해 목표에 대해 박도현은 “건강하게 내년을 맞이하고 싶다. 지금 가진 것들을 잘 활용해서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한다. 결국 선수 생활과 이어진다”면서 “LCK 우승이 목표다. 리그 우승은 굉장히 영광스러운 타이틀이다. 우승하고 난 뒤 얼마나 기쁜지 알기 때문에 좀 더 원하게 된다”고 다짐했다.
박도현은 끝으로 “어디에 있든 항상 응원해 준다는 팬들이 많다. 진심으로 감사하다. 한 번은 내가 방송에서 리액션한 적이 있는데, 그걸 캡처해서 치어풀을 만들어 주셨다.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너무 고맙다”고 팬들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김영건 기자 dudrjs@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