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46)

[인문학의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46)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진주는 모조품

기사승인 2024-07-15 10:14:37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664~67, 캔버스에 오일, 44.5x 39cm,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반지, 브로치 또는 팔찌는 하지 않고, 가끔 머리에 리본 몇 개를 했을 뿐이다. 

이것은 페르메이르가 자신의 그림 절반에서 제라르터의 그림과 같이 17세기 하반기의 패션 트렌드에 따라 진주 귀걸이와 목걸이만 묘사했기 때문이고, 바로 그 점으로 더욱 주목받는다. 

트로니에 있는 네 명의 소녀들 사이에서 커다란 진주가 박힌 귀걸이가 가장 인상적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그 값비싼 귀걸이 덕분에 현대적인 타이틀을 얻었다.  

가브리엘 메추, 프란스 반 미에리스, 페르메이르 등이 활동하던 시대에 진주는 주로 아시아로부터 수입된 것이었다. 인도의 남동쪽과 스리랑카의 서쪽 해안 사이의 만나르 만이 진주 채집의 주요 장소였다. 이 지역에서 온 진주는 대부분 흰색이고, 지름이 8~9mm이며, 무게는 1g을 넘지 않는다. ​

페르메이르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나머지 세 소녀에서 묘사한 방울 진주는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화가의 수입을 훨씬 초과한다. 몇 년 전 네덜란드의 미술 사학자 모니크 나호르스트(Monique Rakhorst)는 헤이그의 보석상 토마스 클레처(Tomas Cletcher)의 17세기 진주 무역에 관한 기록을 주시했다. 

그것에 따르면 무역 상품인 진주는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다. 예를 들어 클레처는 1632년에 런던에서 큰 진주 두 개를 천 파운드에 구입했다고 기록했다.​

토마스 클레쳐는 아말리아 솔즈 공주를 위해 한 쌍의 방울 귀걸이를 만들었다. 3년 후 그는 공주의 남편 프레더 헨드릭에게 20개의 진주를 팔았는데, 왕자는 이 진주에 3만 길더를 지불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다양한 진주와 보석의 특성이 4만 길더에 이른다며 주목했다. 렘브란트의 암스테르담 저택이 13,000길더였으니 저택을 세 채 사고도 남을 거액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는 베네치아 유리 공예가들이 판매한 모조 유리 진주이다.​​ 

​그러나 모조 진주라 한들 그 아름다움이 반감되지는 않는다. 우린 페르메이르가 진주의 우아한 빛을 놓치지 않기 위해 빠르고 얇게 칠한 터치와 그 어려운 표현을 성공해 낸 매혹적인 기교에 놀랄 뿐이다. 천하의 스칼렛 요한슨일지라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분장한 영상에서 그림만큼 기품을 발산하지는 못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부분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빨간 모자를 쓴 소녀, c. 1664~67, 패널에 오일, 22.8x18cm,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앤드류 W. 멜론 컬렉션

<빨간 모자를 쓴 소녀>는 파란색 토가나 장식 무늬가 있는 반짝이고 무게감이 있는 천으로 만든 숄로 감싼 반면, <베일을 쓴 소녀>는 고급스러운 파란색 천이다. 그녀의 어두운 갈색 머리에 있는 노란 베일이 뒷목에서 등으로 떨어진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베일을 쓴 소녀, c. 1664~6, 캔버스에 오일, 44.5x 40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플롯을 든 소녀>에서는 야자수 잎이나 대나무로 엮은 베트남 모자 논(non)를 연상시키는 회색, 흰색, 검은색 줄무늬 천으로 덮인 원뿔형 모자에 관심이 집중된다. 이 전통모자는 아오자이(ai dai), 시클로(cycle)와 함께 베트남을 상징한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플룻을 든 소녀

<빨간 모자를 쓴 소녀>에서 고급스러운 천으로 만든 모자와 호화로운 의상을 입은 젊은 여성은 렘브란트의 첫 부인인 사스키아(Saskia)의 트로니에 영향을 받았다. 이 트로니가 나오기까지 그 연원을 추적해 올라가면 렘브란트와 그의 제자에까지 연결된다. 

(왼쪽) 페르니난드 볼(Ferdinand Bol), 모자를 쓴 젊은 여인, 1644, 에칭과 드라이포인트, 102x77mm, 암스테르담 라익스 뮤지엄
(오른쪽)페르니난드 볼(Ferdinand Bol), 베렛(Beret)을 쓴 젊은 남자, 1642, 에칭과 드라이포인트, 88x78mm, 암스테르담 라익스 뮤지엄

<빨간 모자를 쓴 소녀>에서 털로 덮인 챙과 빛나는 두건은 렘브란트의 제자 페르니난드 볼(Ferdinand Bol)의 위 좌측 작품에 보이는 에칭과 가장 유사하다.

또 그 작품은1642년의 <베렛을 쓴 젊은 남자>라는 볼(Bol)의 트로니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 베렛을 쓴 볼의 트로니는 그의 스승 렘브란트의 <베렛의 쓴 자화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렘브란트, 34살의 자화상, 1640, 런던 내셔널 갤러리: 이는 렘브란트의 중년 시절 자화상으로 베렛를 쓴 자부심이 넘치는 당당한 모습이다.

이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입은 옷에 대해 살펴보자.

1676년 페르메이르 사후 그의 유산 목록에는 '터키식으로 그려진 두 트로니'가 있다. ​'터키풍'과 ‘앤티크(고풍스러운 옷)'는 의상 설명에 사용되며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터키풍은 주로 멘틀이나 터번과 같은 의류와 액세서리로, 주로 집안에서 입는 이국적인 의상을 부르는 통칭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머리 장식 터번이 하나의 예이다. 또한 소녀가 입은 일본풍의 자켓은 먼 나라 일본과의 문화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풍스러운 옷'은 단순히 실크, 새틴, 벨벳과 같은 고급스러운 직물의 아름다운 숄을 의미한다. 이는 <베일을 쓴 소녀>의 양식화된 주름 장식에서 가장 생생하게 묘사된다. 

벨기에의 작가 구스타브 반지페(Gustave Vanzype)는 1908년 처음으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베일을 쓴 소녀>의 모델 둘이 모두 페르메이르의 딸이라 주장했다.

화가가 가끔 그의 딸에게 포즈를 취하도록 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주장을 증명할 수는 없다. 페르메이르의 딸들은 1654~55년 사이에 태어났다. 따라서 아버지가 트로니를 그린 1664~67년 사이에 겨우 10~ 13살 사이였을 것이다.  

페르메이르 연구에서 <빨간 모자를 쓴 소녀>가 양성적이라는 추정이 자주 나온다. 나도 처음엔 ‘소년’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제목이 '소녀'라서 다시 세밀하게 보았다. 많은 이들이 같은 착각을 했다는 뜻이다.​

당대의 패션에 맞춰 <빨간 모자를 쓴 소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베일을 쓴 소녀>는 모두 아치형 눈썹을 그렸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이마가 터번으로 가려져 있는 반면, <베일을 쓴 소녀>는 유행과는 달리 넓은 이마를 뚜렷이 묘사했다. '불편함은 또한 자부심과 함께 온다'는 네덜란드의 경구가 있듯이 이마를 더 넓어 보이기 위해 집게로 머리카락을 뽑거나, 더 가늘게 만들기 위해 눈썹을 뽑는 일이 흔히 있었다. ​​

이런 행위는 톡 뛰어나온 이마가 미인의 조건이었던15세기 부르고뉴 공국 때부터 유행이었다. 디르크 바우츠(Dirk Bouts)의 <오토 3세 황제의 재판, 1468>에서 백작부인의 이마를 보면 이런 유행을 알 수 있다.​ 

디르크 바우츠, 정의의 패널화: 오토 3세 앞에서 불의 심판을 받고 있는 백작부인 부분, 1468년경, 유화, 182x324cm, 벨기에 브뤼셀 왕립미술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페르메이르 역시 시대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스승이나 선배 또는 동료 화가들의 영향을 받으며 예술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장인 정신을 추구해 왔다. 

플라톤의 <향연>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6명의 철학자들이 먹고 마시며 사랑에 대해 토론한 기록이다. 여기서 ‘에로스의 사다리(ladder of love)’를 이렇게 정의한다. 낮은 단계의 아름다움에서 높은 단계의 아름다움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즉 하나의 아름다운 몸에서 시작해 아름다운 활동들로, 더 나아가서는 아름다운 지식들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아름다움 그 자체’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에로스의 사다리’란 사랑의 대상이 아름다움이므로 곧 ‘미의 사다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에서 추구하는 아름다움이란 추(醜)를 포함한 아름다움이다. 결국 미(美)의 사다리를 한 발 한 발 올라가다 보면 진리에 닿게 된다. 페르메이르도 그렇게 진리를 추구했다. 

우리가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예술가의 손을 잡고 ‘미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일이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홍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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