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 [취재진담]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 [취재진담]

기사승인 2025-01-03 16:24:25
2024년 갑진년(甲辰年) 용의 해가 저물고, 2025년 을사년(乙巳年) 뱀의 해가 떠올랐다. 올해는 ‘푸른 뱀의 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뱀은 지혜와 부활, 생명의 탄생, 치유를 상징하는 동물로 등장한다. 아폴론의 아들이자 뱀과 깊은 연관이 있는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으로 그려진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은 병원 역할을 하며 불치병 환자들이 기적적인 치료를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고대 그리스의 의사이자 철학자인 히포크라테스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념과 철학을 이어받아 과학적 의학의 기초를 다졌다. 오늘날 의사의 직업적·윤리적 서약으로 여겨지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도 아스클레피오스의 이름이 등장한다. 특히 뱀 한 마리가 휘감고 있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건강과 회복을 의미하며 전 세계적으로 의료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로고에도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가 새겨져 있다. 국내에선 대한의학회, 대한내과학회 등 의사단체 로고에 등장한다. 대한의사협회(의협) 로고엔 뱀이 그려져 있다. 단체의 로고는 정체성과 가치를 드러내고, 회원 간 동질성과 자부심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의사단체들이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을 로고에 쓰는 이유는 인류가 질병을 극복하길 바라며 의학의 발전과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는 가치를 이어나가기 위함일 것이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과 신화는 단순히 고대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연결되며 의료인의 책임과 치료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지난 1년간의 모습은 어떠했나. 의과대학 입학 정원 증원 등 정부의 의료정책에 반발해 대학병원 전공의 1만여명이 집단 사직했다. 의대생은 동맹 휴학으로 수업 거부를 이어갔다. 거리에 나선 의사들은 의료개혁 전면 철회를 주창했다.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전공의·의대생의 신상정보가 적힌 이른바 ‘의료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유포했다. 의사·의대생만 인증을 거쳐 가입이 가능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조선인이 응급실을 돌다 죽어도 아무 감흥이 없다”거나 “생을 마감할 뻔한 경험들이 여럿 쌓여야 생명을 다루는 의사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심을 갖게 된다”는 등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글이 여럿 올라왔다. “매일 1000명씩 죽어 나갔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심지어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모친을 잃은 의대생을 조롱하는 글에 “자식이 죄인인데 벌은 부모가 받았네”라는 댓글이 달리는 등 도 넘은 언사가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의료인을 정책 추진의 파트너로 삼아 올바른 의료 환경을 구축하고 국민 건강권을 수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정부는 어떻게 했나. 의사들을 ‘반국가 세력’ ‘처단 대상’으로 몰며 직역 이기주의에 매몰된 집단으로 치부했다. 전공의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업무개시명령과 사직서수리금지명령을 내렸다. 설익은 의료개혁 정책은 반감만 샀다. 의료공백 문제를 촉발시킨 ‘2000명’이라는 숫자가 처음 논의 테이블에 올라온 것은 지난해 2월6일 열린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였고, 그날 오후 통보하듯 증원 결정이 발표됐다. “전공의와 학생은 물론 전체 의사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라는 보정심 참석 위원의 우려는 묵살됐다. 정부가 공언했던 의대 교육 환경 개선은 지지부진하다. 3년 내 1000명을 늘리겠다던 지방의대 교수 충원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상진료체계를 유지하느라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마저 흔들리고 있다. 인력 이탈로 지역의료는 더 열악해지고 있다.

작년 2월부터 이어진 의정갈등 사태는 해를 넘겨도 현재진행형이다. 고통은 환자와 가족들의 몫이 됐다. 수술 일정이 밀리고 치료 가능한 응급실을 찾아 헤매다 목숨을 잃었다. 작년 12월31일 기준 보건복지부 의사 집단행동 피해신고·지원센터에 접수된 누적 수술지연 피해신고는 504건으로 나타났다. 진료차질은 220건, 진료거절은 158건으로 집계됐다. 의정갈등이 평행선을 달리는 사이 의사에 대한 국민적 불만과 증오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시민들은 의사를 ‘의주빈’ ‘의마스’로 지칭하며 비난한다. 의주빈은 N번방 사건 범죄자인 조주빈에, 의마스는 민간인을 학살한 하마스에 의사를 빗댄 표현이다.

의정갈등 해법은 미궁 속이다. 올해 전공의와 의대생이 돌아올지 미지수다. 2025학년도 정시 모집까지 마감된 이상 복귀 가능성은 낮게 점쳐진다. 현 상태에서 무너진 정부, 의사, 국민 간 신뢰를 어떻게 바로 세울 수 있을까. 의사들은 “일방적인 정책 추진”이라며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다. 간호사 등 다른 의료계 직역 간 반목도 심화될 조짐이다. 의사단체는 오는 6월 시행을 앞둔 ‘간호법’을 악법으로 규정했다. 정부는 의료계가 대화에 참여하든 말든 비급여·실손보험 개혁방안 등이 담긴 의료개혁 2차 실행방안을 이르면 이달 중 발표할 예정이다. 시민들은 치료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노심초사하며 서로에게 “아프지 말라” “안 다치게 조심해라”라는 인사를 건넨다.

신뢰는 상호 대화와 존중 위에 꽃핀다. 서로에 대한 이해 없이 무작정 주장만 관철하면 관계는 어긋난다. 의정은 같은 논의 테이블에 앉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부는 일방적인 의료개혁 정책 강행을 사과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의료계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이정표 삼아 타협하고 의료인으로서 환자의 건강을 우선해야 한다. ‘청사(靑蛇)의 해’가 얽히고설킨 의정갈등의 매듭을 풀고 지속 가능한 의료체계를 논해 그동안의 상처를 봉합하는 ‘치유의 해’가 되길 바란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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