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후 일주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이 끝났다. 그 사이 수많은 사람들이 분향소를 찾아 함께 슬퍼했고, 방송사는 연말연시를 기념하고 축하하는 프로그램을 일시 중단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어째서 우리가 송년회를 취소하고, 재미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즐길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냐며 반문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애도에 동참해야 하는 걸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은 이타주의를 만들어내고, 이타주의는 다시 공동체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누군가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상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일어난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왔던 내 가족, 내 친구의 고통에 공감하고 반응하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건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 예민하고도 섬세한 감수성을 필요로 한다.
이처럼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타인에 대해서도, 그 처한 상황과 배경 그리고 감정과 경험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사회적 감수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감수성을 가진다는 건 단순히 그 사람을 동정하고, 연민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이 겪는 상황의 부조리함을 인식하고, 변화를 위한 행동을 시작하는 것으로 확장돼야 한다.
트라우마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충격적인 일을 경험하고,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애도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는, 얼굴을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 사회적 감수성을 기르고, 공감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혹시 모를 어려움에 처할 수 있는 나와 혹은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어려움 속에 놓인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회는 사회가 아니다. 그저 각자도생의 원칙으로 굴러가는 정글과 다를 바 없다.
이제 유가족들은 인생에서 겪어보지 못한 가장 힘든 애도의 과정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끝까지 그들의 곁에 있어 주는 방법을 국가적 차원에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위정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공감적 상상력은 이들의 장기적인 심리 지원에 대한 법적, 제도적 체계를 마련하는 것으로 구현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