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국무부 개편(reorganization)에 대한 내부 문건이 CNN등을 통해서 공개된 이후 22일(현지시간) 마크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오는 7월 1일까지 시행될 국무부 개편안을 발표했다. 이번 국무부 개편안에 깔린 핵심적인 정책 기조가 장기적으로 향후 한미관계의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는 불확실하지만, 현재 진행중인 상호관세 등에 대한 한미간 협의에 있어 난항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루비오 장관이 민주주의, 인권 등 소위 ‘소프트 파워(soft power)’와 직결된 외교 역량의 대대적인 축소를 공언한 것은 지속가능한 가치동맹의 중요성 보다 미국 국익 최우선주의를 중심으로 동맹 관계를 변화시키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적 의도를 밝힌 것이다.
소프트 파워 개념의 창시자인 조셉 나이(Joseph Nye) 교수는 정보화시대에서 변화를 이끌 최적의 외교정책 수단으로 비강제적인 정치 가치와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국무부 개편안에 따라, 민간안보, 민주주의, 인권 등을 담당한 부서와 직책이 대폭 축소되거나 사라질 전망이다. 냉전 이후 형성된 단극체제(unipolar system)에서 미국은 ‘지배의 리더십’이 아닌 ‘협력의 리더십’을 성숙시켰고, 이 같은 전략적 패턴의 예외는 ‘테러와의 전쟁’이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글로벌 패권국가로서 모범적 리더십을 포기하고 소위 ‘수퍼 트럼피즘(super trumpism)’으로 대변되는 미국 우선주의 실현을 위해 미국의 모든 외교역량을 대대적으로 재편하는 것은 장기간 지속될 기회비용의 위험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미시적 국익추구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일 상호관세를 부과를 발표한 뒤 무역 상대국들과 양자간 협의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24일(현지시간) ‘한미 2+2’ 협의를 가질 예정이다. 양측 대표자들이 논의할 의제가 구체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의 전략적 의도대로 이번 협의가 사실상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입장에서는거시적 한미동맹 차원의 이익과 트럼프 행정부가 지향하는 미시적 국익 추구를 조화시킬 혜안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번 국무부 개편안의 주요 내용을 보았을때 가치동맹을 근간으로 한 한미동맹의 전략적 중요성이 상호관세 등을 포함한 한미간 협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매우 낮아 우리의 협상 접근법 수정을 심각히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는 동맹 차원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반면 미국은 일방주의적 수퍼 트럼피즘을 앞세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수익성이 매우 불투명한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파이프라인 사업에 대한 투자를 한일 양국에 압박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지난해 한국수출입은행은 블룸버그에너지파이낸스(BNEF)의 수요 공급 분석을 토대로 2027년 이후 세계 LNG 시장에서 공급 과잉이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처럼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 사업에 대한 투자 리스크가 크게 우려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일본과의 협력을 통한 공동 협력 방안 등을 고려하고 있지만, 한일간 구체적 협의는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다. 만약 우리보다 앞서 미국과 통상 협상을 진척시키고 있는 일본이 대만, 호주, 인도 등과 협력하여 미국과 투자 리스크 관리 방안을 도출할 경우 우리에겐 예상치 못한 악재가 될 것이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다. 미국이 상호관세 부과 90일 유예를 발표하면서, 한국, 일본, 영국, 호주, 인도 등 5개국을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목했다. 우리는 동맹국이 아닌 무역상대국 입장에서 보다 철저히 현실적으로 수퍼 트럼피즘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미국과 협의를 추진하는데 있어 기타 4개국과 비교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분명한 약점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동맹국으로서 가진 강점을 트럼프 행정부에 호소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우리의 가장 심각한 약점은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인한 정치 공백이고, 정치권에 만연한 반미주의, 현존하는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 한미연합방위태세의 변화로 초래될 정치 및 정책적 혼란 등도 간과할 수 없다. 우리 정부가 6월 3일 대선 이후 미국과의 협상을 타결하겠다는 계획은 미국의 입장에선 순진한 발상에 가깝다.
박진호 국방부 정책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