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노사 협상 극적타결…어떻게 가능했나?

쌍용차 노사 협상 극적타결…어떻게 가능했나?

기사승인 2009-08-06 22:26:01


[쿠키 경제] 박영태 쌍용자동차 공동 법정관리인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6일 오전 9시40분이다. 한상균 노조 지부장은 "만나자"고 했다. 박 관리인이 2일 7차 협상장을 박차고 나온 지 나흘 만의 첫 대화였다. "의미 있는 입장 변화를 보이겠다"는 한 지부장 말에 '마지막 협상'이 열렸다.

77일을 끌어온 점거 파업은 불과 1시간18분 대화로 해결됐다. 노조는 정리해고를 받아들였다. 사측은 '60(정리해고) 대 40(무급휴직)'이던 해고자 대책을 '52 대 48'로 수정했다. 농성자 중 52%는 회사를 떠나야 한다. 승패를 따지자면 농성자는 한 명도 해고할 수 없다던 노조의 패배다. 장기간 '옥쇄 파업' 끝에 극한 노·노 갈등을 겪으며 정리해고를 수용한 노조는 기반이 흔들리게 됐다.

농성장 변화 조짐은 5일 저녁부터 감지됐다. 결렬 선언 당일 89명이 나온 뒤 3일 17명, 4일 20명 등 정체를 보이던 이탈자 규모가 5일 경찰의 2차 진압 작전 이후 급증했다. 5∼6일 이탈자는 111명. 640여명이던 농성자는 400여명으로 줄었다. 4, 5일 이틀 간 벌어진 경찰 작전에 노조는 힘이 크게 떨어졌다.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자를 비롯해 부상자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면서 노조원들은 동요했다. 5일 진압 작전 중 연행된 한 노조원은 "이탈자를 배신자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경찰 작전 이후 '이해한다'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하루 세 차례였던 주먹밥 지급 횟수가 크게 줄면서 체력 고갈도 심했다.

5일 밤부터 6일 새벽까지 도장2공장에선 노조 집행부 회의와 전체 회의가 잇따라 열렸다. 집행부는 한 지부장을 비롯한 온건파와 이창근 기획부장, 한일동 사무국장의 강경파로 나뉘어 있었다. 6일 아침 취재진 전화에 노조 간부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어떤 이는 "대화 재개를 논의 중"이라고, 다른 이는 "기본 입장이 바뀐 게 없다"고 했다. 경찰이 파악한 전체 농성자 분위기는 '온건파 우세'였다. "회사 최종안을 받아주자"는 얘기까지 나왔다고 한다.

정부 회사 채권단의 완강한 입장에 노조는 선택 폭이 크게 줄었다. 줄기찬 공적자금 투입 요구에 정부는 "1원도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회사는 정리해고 방침을 굽히지 않았고, 협력업체 채권단은 조기 파산 신청을 강행했다. 회사의 '청산형 회생절차'나 채권단의 '조건부 파산안'이 현실화되면 노조는 모든 것을 잃는다. 모두 기존 고용관계 단절을 전제로 회사를 정리하는 것이어서 노조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

노사를 막판에 대화 테이블로 이끈 것은 사실상 정부와 경찰이다. 그 배경엔 용산 참사와 친(親)서민 행보가 있다. 회생계획안 시한에 쫓긴 사측은 줄곧 공권력 투입을 요구했다. 노·노 갈등에 사측 직원들은 경영진보다 훨씬 강경했다. 경찰은 강제 해산을 하려면 진작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사석에서 "용산의 상흔이 남아 있다" "서민정책을 펴는데 어떻게 실직자를 무력 진압하나"라고 했다. "쌍용차가 터지면 정권이 흔들린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도 있었다. 정부와 경찰이 강제 해산을 계속 미루자 사측도 대화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평택=국민일보 쿠키뉴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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