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문화] 1997년 한 대학생이 재미동포와 미국계 한국인에 의해 살해당한 실화를 재현한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이태원)이 조용한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 총 제작비 15억원의 저예산 영화지만 ‘이태원’은 지난 10일 개봉한 이후 누적관객수 48만명을 넘어서며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한국의 켄 로치(영국 출신의 세계적 감독)라 불리는 ‘이태원’의 홍기선 감독을 만났다. 기자가 이전 소속이던 사회부가 찍혀있는 명함을 내밀자 그는 “그렇죠. 이 영화는 사회부 기자들이 봐야죠”라며 반색했다. 재현에 치중해 극적 재미가 부족하다는 평단의 비판이 아쉬워서인 듯 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다듬지 않은 수염, 사람 좋아 보이는 너털웃음. 그는 딱 대학가 분위기 있는 카페 사장같았다. 하지만 영화와 사회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어조는 단호했고 눈빛은 매서웠다.
관객의 호응이 좋은 것 같다고 인사를 건넸다. 홍 감독은 “좋은 배우와 좋은 스텝을 만난 덕분”이라며 “또 관객들이 영화의 진지함을 높이 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그는 ‘이태원’을 영화로만 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영화에서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으니까 극적 요소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죠. 하지만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미해결로 끝난 이 사건을 환기시킨다는 게 목표였습니다.”
이 영화는 멋 부리거나 돌려 말하지 않는다. 치밀하고 묵직하게 그때 그 사건에 다가선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그는 미국에 있는 용의자 2명을 제외하고는 담당 검사 및 변호사, 미군 관계자 등 사건 관련자를 대부분 만났다. 아내이자 각본을 담당한 이맹유 작가와 함께 피살자 가족을 수차례 만났고 당시 재판 기록과 신문 기사 등 자료도 꼼꼼히 챙겼다.
“둘 중 한 명이 죽인 건 확실한데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무죄가 됐어요. 피살자 부모님은 ‘아들이 두 번 죽었다’고 얘기합니다. 한 번은 이태원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한 번은 법정에서. 범인이 눈앞에 있는데 법은 아무런 해결을 해주지 않았으니까. 국민이 세금으로 만들어놓은 조직이 결국 두 사람을 풀어준 건데 국가가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충분한 증거가 없으면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법적 진리 때문이다.
그는 4년 전 한·미 관계에 대한 소재를 찾다가 이 사건을 알게 됐다. 직접 피살자 집을 찾아갔다. 부모는 죽은 지 8년이 된 아들의 방을 치우지 않고 살고 있었다. 다른 식구들은 상처를 다시 꺼내지 말라며 영화화를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그의 손을 잡고 부탁했다. 아들의 한을 풀어달라고.
그는 이 사건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의 양태를 그대로 담고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속은 미국인 겉은 한국인인 아이들. 그들은 재미 삼아 살인을 했고, 한국인을 ‘Korean guy’라고 부르며 타자화했다. 홍 감독은 “다문화가 뒤섞인 이태원, 미국적인 패스트푸드점, 그 안에서 일어난 동포에 의한 살인. 이 사건은 미국 문화 우월주의, 영어 광풍에 휩쓸려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사실 영화를 만들고 개봉하면서 1차적인 목표는 이룬 셈이에요. 궁극적으로야 영화를 통해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죠. 용의자가 어떤 영향을 받기도 바라고. 현실적으로는 힘들겠지만.”
그가 이 영화를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단순히 흥행을 위해서가 아니다. 더 많은 사람이 이 사건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다.
12년 전 어느 봄날, 이태원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피투성이가 돼 죽어간 청년의 한을 영화는 과연 달래줄 수 있을까. 국민일보 쿠키뉴스 양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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