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령 현역비서 전성희 이사 “하찮은 일을 하찮게 여기지 말아야죠”

국내 최고령 현역비서 전성희 이사 “하찮은 일을 하찮게 여기지 말아야죠”

기사승인 2009-09-29 17:28:00

[쿠키 경제] 미모의 젊은 여성일 것이라는 상상은
깨졌다. 그녀의 나이는 환갑을 훨씬 넘긴 올해 예순 여섯. 하지만 아담한 체구에 짧은 커트 머리, 밝은 음성은 두명의 손녀를 둔 할머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그녀는 ‘영원한 비서’다.

1979년부터 올해까지 30년 동안 단 한사람의 비서역으로만 일해온 대성산업 수석비서 전성희 이사. 그녀는 국내 최고령·최장수 현역 여성 비서다. 상무 시절부터 전무, 부사장, 사장, 부회장에 이어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앉은 지금까지 대성산업 김영대(67) 회장은 ‘그녀’ 없이 일을 하지 못한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생전에 남긴 ‘남자의 생애에서 아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비서’라는 말이 가장 가슴에 와닿을 사람은 김 회장일 것이다. 한 살 차이인 김 회장을 그림자처럼 보좌하며 함께 나이를 먹고 있다.


“어머 반가워요. 어서 들어오세요∼” 29일 오전 서울 인사동 대성산업 회장 비서실에서 만난 전 이사는 첫 인상부터 범상치 않았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중 ‘솔’음에 가까운 높은 톤의 목소리와 환한 미소로 첫 인사를 건넸다.

“지금도 정말 비서 업무를 보시는 게 맞나요?” 첫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 이사는 양해를 구하며 회장실로 향했다. 김 회장 주재로 막 회의가 끝난 회의실을 정리하고 회장의 다음 스케줄까지 확인하고 조치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30년 동안 달라진 건 없어요. 차 심부름부터 전화 교환, 통·번역, 고민 상담, 비즈니스 파트너… . 정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예요.”

30년째 같은 일을 하는 게 지겨울 법도 했다. “그렇지 않아요. 패턴은 비슷할 수 있지요. 하지만 매일 매일 달라요. 회장님을 찾는 손님이 다르고, 전화를 걸어오는 상대방도 다양해요. 회장님이 소화하는 일정도 똑같은 적이 단 하루도 없는데 어떻게 일이 지겨울 수 있나요. 설레이면 모를까. 호호호”

사실 전 이사는 콧대가 높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한 여자다. 1960년대 당시 최고의 신부감으로 꼽혔다던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출신의 남편과 결혼해 미국 하와이에서 10년을 살았다. 아버지까지 광복군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으니 당대 최고의 엘리트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서를 두고 살 만했던 그녀의 인생이 반평생 가까이 남의 비서로 헌신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그놈의 정’ 때문이었다. 1979년 4월 중순, 부푼 꿈을 안고 대형병원 약사 면접을 준비하던 그녀는 중견 회사 임원으로 일하던 남편 친구의 비서직을 얼떨결에 제안받았다. 그녀는 남편 체면을 생각해 ‘한번 만나보기만 하자’며 회사를 찾아갔다.

그 곳이 바로 대성이고, 당시 만났던 임원이 지금의 김 회장이다. 2004년 세상을 떠난 전 이사의 남편과 김 회장은 절친한 대학 친구였다. ‘남편 덕분에 취직된 거 아니냐’는 뒷말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지요. 일은 못하는데 친구 부인이라 억지로 데려왔다는 얘기를 듣기 싫어서요.” 주위에서는 이런 마음가짐이 지난 30년 동안 그를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고 평가한다.

전 이사는 입사 이래 오전 6시에 출근하고 있다. 집에 나서는 시간이 아니라 회사에 도착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그녀는 외국어를 공부했다. 입사 첫해 회사가 일본 거래처와 일이 많아지는 걸 알고 일본어를 시작했다. 프랑스 시장을 뚫기 시작했던 84년부터는 프랑스어책을 폈고, 90년대 들어서는 김 회장의 지시로 중국어를 섭렵했다. 평소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영어까지 포함해 전 이사는 4개 국어를 구사하고 있다. 업계에서 ‘명품 비서’로 불리는 이유다.

업무에 있어서도 그녀는 ‘멀티플레이어’를 강조하는 독종으로 통한다. “커피를 타는 일부터 바이어를 옆에 두고 통역하는 업무까지 모두 다 똑같은 비중으로 중요해요. 또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늘 더듬이를 켜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모시는 분 뿐만 아니라 회사도 발전하거든요.” ‘명품비서’를 꿈꾸는 수많은 후배들에게 빼놓지 않는 메시지는 뭘까. “하찮은 일을 결코 하찮게 여기지 마라.”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박재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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