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레임덕 블랙홀에 빠질 수 있다

MB, 레임덕 블랙홀에 빠질 수 있다

기사승인 2011-01-11 19:18:00
[쿠키 정치] 한나라당이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에 대해 자진사퇴를 요구한 사건을 놓고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이미 시작된 게 아니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대통령의 레임덕 문제가 이번에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의 패배, 국회에서 세종시 수정안 부결, 김태호 총리 후보자 등 ‘8·8개각’ 인사들의 연쇄 낙마 때도 간혹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이번엔 양상이 다르다. 여당 지도부가 이 대통령의 인사 결정을 놓고 ‘항명’ 사태를 일으킨 것은 정권 출범 이래 처음있는 일이다. 당 내부에서 레임덕 얘기가 스스럼없이 나오는 이유다. 친이계 핵심 의원이 본보와의 통화에서 “청와대가 레임덕을 자초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경필 의원은 11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진시황도 못 막았던 게 레임덕”이라며 “레임덕은 당연히 온다. 그러나 그것을 오히려 협의하고 협상하면서 이해를 구해가면 그 레임덕은 천천히 오게 되는 것이고 지금처럼 하게 되면 레임덕이 더 빨리 오는데, 이번 사태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역대 어느 정권이든 시기와 양상에 다소 차이가 있을 뿐 레임덕은 있었다. 5년 단임제에서 대개 3, 4년차에 다가오는 레임덕은 숙명과 같다는 얘기도 있다. 레임덕의 징후 내지 요건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크게 여당 등 내부로부터의 공격, 각종 권력형 비리 사건 발생, 여권 내 강력한 차기주자의 부상, 고급 정보의 야당 쪽 유출 등이 꼽힌다.

특히 노무현 정부를 비롯해 과거 정부에서도 집권 3, 4년 차 때 대통령이 소속 정당으로부터 압박을 받는 것을 기화로 레임덕이 시작됐다. 여기에 측근 비리 등이 더해지면서 권력누수 현상은 가속화됐다. 바로 앞 정권인 노 대통령 시절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노 대통령은 당시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으로부터 자주 공격받았다. 김승규 국정원장 사퇴와 후임인선 문제,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지명 철회 사태, 대연정 파문,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 강행 등이 도화선이 됐다.

그 중에서도 2005년 10·26 국회의원 재선거 뒤 개최된 열린우리당 중앙위원-국회의원 연석회의에서는 “대통령이 신(神)이냐. 당이 왜 자기 색깔을 내지 못하고 청와대만 따라가느냐”(문학진 의원) “청와대가 당정 분리 원칙을 지킨다고 강조했지만 진짜 중요한 사안은 전부 청와대의 결정을 따랐다”(이호웅 의원) “청와대에서 국민의 목소리를 가로막는 사람을 쇄신해야 한다”(우원식 의원) 등의 발언을 비롯해 청와대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다. 요즘 한나라당 내부 분위기와 상당한 유사점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인데, 그 당시를 노 대통령의 레임덕이 본격화한 기점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노 대통령이 2006년 1월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을 강행했을 때도 “당을 무시한 처사”라는 격앙된 반응이 나왔고, 이어 안영근 김영춘 임종인 문병호 의원 등 초·재선급 의원 18명이 “당청 관계에 대한 근본적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내용의 반발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2006년 4월 노 대통령이 “사학법 양보 권유” 발언을 했을 때는 정동영 당시 당 의장부터 나서 “사학법 근간 훼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거부하며 한나라당이 요구하는 사립학교법 재개정에 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일련의 사태 속에 노 대통령은 “임기를 다 마치지 않은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길 바란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입에 담기도 했다. 이후 당청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어 쌍방간에 극렬한 마찰이 빚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잇단 비리 사건과 여당 내 구주류-신주류 간 내분 사태로 레임덕 현상을 더 빨리 맞닥뜨려야 했다. 임기 4년차 후반부인 2001년 가을 진승현, 정현준, 이용호 등 ‘3대 게이트’에 휘말렸고, 권노갑 최고위원에 대한 사퇴 요구 등 동교동계를 향한 여당 내 개혁파의 공격이 가열되면서 집권 환경이 악화됐다. 권력의 추와 정보가 야권으로 몰리면서 결국 최규선 게이트 등으로 아들 홍업, 홍걸씨 형제가 구속된 것은 그 피날레에 해당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 집권 4년차인 1996년 12월 이른바 ‘노동법 날치기’ 사건을 여당에 지시한 것이 레임덕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이 우세하다. 당시 여론은 크게 분노했고 노동계의 총파업, 야당과 시민단체의 장외 투쟁이 이어졌다. 이듬해 초 발생한 ‘한보 사태’에 민주계 측근들이 줄줄이 연루되고, 급기야 아들 김현철씨 비리가 터지면서 극심한 레임덕에 빠졌다. 현재 한나라당 의원들이 새해 예산안 강행처리에 따른 여론의 역풍을 접하며 김영삼 대통령 때 노동법 날치기 사건을 떠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같은 과거 정권의 사례에 견줘 이 대통령의 레임덕은 이미 시작됐거나 곧 전개될 것이라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이번 인사 파동 이외에도 ‘함바 게이트’로 청와대 감찰팀장이 수사를 받고 있고, 장관 후보자나 검찰 수사와 관련된 정보가 민주당에 입수되는 사례들을 근거로 제시한다. 정치컨설턴트 ‘민’의 박성민 대표는“통상 레임덕의 징후는 정부의 정책이나 인사에 대한 반란, 기밀사항 등 내부 정보의 유출,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의 존재 등 세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며 “이번 정동기 파동으로 레임덕의 모든 조건이 충족된 셈”이라고 진단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레임덕은 외부의 공격과 내부의 공격으로부터 온다. 그런데 진짜 심각한 레임덕은 내부의 공격으로부터 온다”며 “내부 이반이 레임덕을 심화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단언했다. 최 소장은 “이 대통령도 그랬듯이, 매우 중요한 자리에 최측근을 심어 버리면 다른 인사를 아무리 잘해도 필요 없고, 비판의 포화에 맞게 된다”면서 “그래서 이번에 1차 파도가 몰아친 것인데, 이번 인사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으면 2차 파도를 맞고 ‘이반의 도미노 현상’ 등이 벌어져 레임덕의 블랙홀로 빠져 들어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 레임덕이 시작됐다고 보는 건 시기상조라는 신중론도 있다. 이헌환 아주법대 교수는 “행정부의 정책집행에 대한 여당의 견제를 정치적 의도에서 평가하면 레임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상호 견제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충분히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청와대에서도 이 대통령이 국정 장악 및 업무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역대 어느 대통령의 3, 4년차 상황과 달리 50%대의 고공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레임덕을 부정하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

다음은 이 대통령의 레임덕 관련 지난해 발언.

“우리 정부는 출범 때부터 정치자금 등의 문제에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출발했다. 집권 하반기에 레임덕이 있어 대통령이 일하기 힘들 것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까지 다 채우고 일하고 떠나겠다.”(2010년 7월 30일 청와대 확대비서관회의)

“뭐 레임덕이 어떻고 하는데, 임기 마지막 날까지 일하는 사람이 레임덕하고 무슨 관련이 있나. 나는 그걸 잘 이해를 못한다. 그건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시대 이야기다.”(11월 15일 언론 인터뷰)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권력 누수(레임덕)’를 말한다. 일하는 사람에겐 권력 누수가 없다.”(12월 31일 청와대 확대 비서관회의)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
김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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