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전직 정보원으로 사는 법”…국정원 퇴직자 모임 ‘양지회’, 음지에서 양지로?

“우리가 전직 정보원으로 사는 법”…국정원 퇴직자 모임 ‘양지회’, 음지에서 양지로?

기사승인 2011-01-27 20:06:00

[쿠키 정치] 지난 16일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에게 보도자료가 한 장 배포됐다. ‘김만복 전 국가정보원장이 일본 잡지 세카이(世界)에 실린 기고문에서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을 왜곡해 우리 모임의 명예를 실추시켰기에 회원 자격을 박탈한다.’ 발신처는 ‘국정원 퇴직자 모임 사단법인 양지회’였다.

김 전 원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냈다. 세카이 기고문 요지는 ‘이명박 정부의 대결적 대북정책이 서해를 전쟁의 바다로 만들었다’는 것. 그는 “양지회가 나를 퇴출시킨 건 부당하다. 퇴출 철회와 명예훼손 소송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다툼은 계속될 듯하다.

여기서 양측 이념 공방 못지않게 눈길을 끈 것은 양지회란 조직이었다. 신분을 감추고 ‘음지’에서 일하다가, 은퇴해 ‘양지’로 나와서도 보안누설 책임이 따라다니는 전직 정보원들. 그들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는 처음이다.

방배동 981-15 양지빌딩

양지회란 이름의 유래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지었다는 부훈(部訓)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에서 따왔을 터다. 홈페이지가 있긴 하다. 초기화면이 회원번호와 패스워드 입력하는 로그인 페이지여서 회원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보도자료에 밝혔듯이 양지회는 사단법인이다. 설립일이 1990년 8월 16일이니까 벌써 20년이 넘었다. 법인등기부에 명시된 ‘목적’은 이렇다. ‘본회는 회원의 친목단결을 도모하는 한편 국가안보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①회원의 친목, 권익옹호, 직업안정, 복지증진에 관한 사업 ②국가안보에 기여하는 사업을 한다.’

주소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981-15 양지빌딩. 이 7층짜리 건물은 2000년 10월 양지회가 매입해 소유하고 있다. 7층과 6층, 지하 1층 일부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임대했다. 건물 임대료와 회원들의 회비 및 찬조금으로 운영자금을 조달한다.

초대 회장은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의 장인인 고(故)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이었다. 양지회 법인 출범과 함께 7년간 회장을 맡았다. 이후 6년 가까이 안무혁 전 안기부장(87∼88년 재임)이 모임을 이끌었고, 김현희 KAL기 폭파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이상연 전 안기부장이 뒤를 이었다. 지난달 취임한 현 회장은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정무직)을 지낸 이청신(69)씨다.

양지회가 언론에 언급된 기록은 극히 드물다. 91년 박정희 전 대통령 12주기 추도식의 주관단체 19곳 중 하나였고,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 민자당 부대변인은 국민회의 이종찬 의원을 겨냥해 “이 의원은 이준 삼풍 회장과 같은 양지회 멤버다. 삼풍과의 관계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다.(이준 삼풍 회장은 양지회원이 아니며 당시 잘못된 정보가 알려졌던 것이라고 양지회 측은 밝혔다)

2007년부터는 ‘양지회와 해남쌀’에 관한 기사가 해마다 등장한다. 양지회가 자매결연한 전남 해남군 송지면에서 매년 5000∼6000포대씩 쌀을 사가는 덕에 농민들이 판로 걱정을 덜었다는 내용. 지난해에도 회원 연말 선물용으로 2억여원어치를 구입했고, 송지면은 감사패를 전달했다. 그런데 기사에는 ‘서울의 공무원 친목단체’로만 소개돼 국정원 퇴직자 모임임을 눈치 채기란 쉽지 않다.

지난해 5월엔 양지회원 40여명이 충남 부여의 4대강 사업 청남지구 홍보관을 찾아 견학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공개된 자료로 파악할 수 있는 양지회는 여기까지다. 방배동 사무실로 전화를 건 것은 17일이었고, 양지회 사무총장(59)은 일주일 뒤인 25일 “한번 사무실로 와보라”고 했다.

양지빌딩선 무슨 일이…

양지회 사무국은 양지빌딩 7층이다. 같은 층에 양지장학회가 있고, 6층은 회원들이 서예 그림 컴퓨터 등을 배우는 강의실. 지하 1층엔 운동시설을 갖춘 공간과 상담실이 있다. 인터뷰에 응한 사무총장은 익명을 원했다. 보도자료를 내게 된 경위부터 물었다.

“13일 아침 지하철로 출근하는데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어요. 전화한 회원마다 조간신문 봤냐고 묻더군요. 김만복 전 원장 기고문이 보도된 날입니다. 사무실 와서도 회원들 전화가 빗발쳤어요. 양지회 이사가 38명인데, 다음날 긴급이사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제명한 겁니다.”

그는 “우리 퇴직자들과 소통하는 현직 직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국정원에 김 전 원장 기고문이 재직 중 알게 된 기밀을 누설한, 국정원직원법 7조 위반이 아닌지 검토해보라고 요청했어요. 아마 검토 중일 겁니다”라고 덧붙였다. 국정원은 실제 26일 김 전 원장을 국정원직원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사무총장은 양지회원이 약 7000명이라고 했다. 90년 이전에도 같은 이름의 친목모임이 있었고, 법인화 이후 퇴직자는 원장 차장 등 최고위직까지 거의 100% 가입했다는 것이다. 해마다 6월과 12월이면 수십명씩 퇴직자들이 신규가입을 해온다고 한다. 경북지회 부산지회 같은 지방 모임도 있다.

양지회 안에는 100여개 소모임이 있다. 그는 이를 ‘등록단체’라고 불렀다. “북한 연구하는 스터디 그룹, 해외파트 근무자들의 지역별 연구모임, 입사 동기 모임, 같은 부서 출신자 모임 등입니다. 김 전 원장도 이렇게 참여하는 모임이 많았어요. 제명되면 그런 자리에 가기 어려워지는 거죠.”

등록단체 가운데 가장 활성화된 것은 대공수사 업무를 했던 이들의 모임 ‘덕우회’다. 대공 업무에 관한 스터디와 자문활동을 하면서 재향군인회의 기무사 출신자, 경우회(경찰 퇴직자 모임)의 대공업무 출신자 모임과도 교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지회 이사는 해외, 수사, 정보, 북한, 지원 파트 등 출신 직능과 연령, 직급을 고려해 골고루 선발된다. 100명 가까운 대의원도 있다. 양지장학회는 중앙정보부 출신 기업인 정문술 미래산업 대표가 5억원을 출연하고 현직 국정원 직원들이 따로 5억원을 모아 기부해 99년 설립됐다. 퇴직자들에게 자녀 학자금을 지원한다.

격월간지 ‘양지회보’도 발간하는데, 최신호를 보니 ‘시론-2011년 남북관계 전망’ ‘논단-김정은 후계체제와 남북관계’란 글이 실렸다. 회원들에게만 배포하는 책자여서 외부인에겐 줄 수 없다고 한다. 이렇게 폐쇄적인 양지회가 전직 정보원들에겐 어떤 존재일까?

“생활공간이죠. 정보 업무 하던 사람들은 세상 물정을 잘 몰라요. 심한 경우 버스 환승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도 봤어요. 또 외롭습니다. 정보원 하다 보면 친구 사이도 소원해져요. 만나면 자꾸 업무에 관해 묻는데 그걸 말하면 보안누설이니까 만남 자체를 꺼리게 돼요. 그러다 퇴직하면 재취업도 거의 불가능하고, 새로 사람을 만나도 국정원 출신이란 얘기를 잘 못합니다. 부정적 이미지도 많고, 보안누설 책임이 여전히 따라다녀서. 여기로 오는 거죠.”

양지빌딩 6층은 일종의 ‘취미교실’이다. 서예 한문 유화 국선도 수지침 같은 강좌가 열리고, 컴퓨터반이 인기라고 한다. 최근엔 스마트폰 사용법 강의를 했고, 페이스북과 트위터반도 개설됐다. 그는 회원들이 하루 수백명씩 이 건물을 드나든다고 말했다.

양지회의 목소리

사무총장은 이런 말을 했다. “양지회 설립 목적 중 하나가 국가안보에 기여하는 것인데, 사실 그동안 이 목적을 위한 활동은 드러내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안보에 관해서만은 나설 것이다. 정치에 연루되지 않는 범위에서. 이렇게 언론과 인터뷰하는 것도 양지회 설립 이후 처음이다.”

20여년 침묵하던 전직 정보원들이 이제 목소리를 내겠다고 한다. 마침 한반도 안보지형은 예측을 불허하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양지회의 목소리, 좋든 싫든 제법 자주 듣게 될 듯하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김철오 기자
wjtae@kmib.co.kr
김철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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