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연예] 아픔을 겪은 뒤 세운 목표는 희망을 선물로 안겨 주는 것일까. 서해(西海)를 건너 중국 베이징에서 마주 대한 배우 박해진(29)은 한결 차분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지난해 심한 좌절감을 맛봤던 사람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비교적 평온한 모습이었다. 오는 11월 방영 예정인 중국드라마 25부작 ‘첸둬둬의 결혼이야기’에서 남자주인공 ‘쉐페이’ 역으로 캐스팅돼 희망을 일구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드라마 현장에서 박해진을 만났다.
지난 17일 중국 베이징 외곽에 위치한 아파트 앞 공터. ‘첸둬둬의 결혼이야기’ 촬영이 한창이었다. 붐 마이크(boom microphone)에 반사판을 들고, 배우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미세하게 포착하려는 스태프들의 몸놀림은 ‘이곳이 중국인가’ 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촬영 환경과 닮아 있었다.
자신의 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배우들 속에서 간간이 웃음꽃이 피어났다. ‘옌웬’ 역을 맡은 중국 여배우 황샤오레이에게 간단한 중국어와 손짓으로 농담을 던지는 박해진 때문이다. 지난달 2일 첫 촬영을 시작한 뒤 한 달 남짓 지나서인지 박해진은 중국 배우들과도 웃음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져 있었다. 지난 2006년 8월 그의 데뷔작이자 KBS 인기드라마였던 ‘소문난 칠공주’ 현장공개에서 만났을 때, 첫 대면한 기자들과 눈도 마주칠 줄 몰라 마른 침만 꼴깍 삼키던 풋풋한 박해진은 온데간데없었다.
현장 분위기를 주도하며 여유롭게 촬영에 임하는 그에게서 새삼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밝은 표정과 자신감 넘치는 행동은 ‘연기를 하는’게 아닌 ‘즐기면서 하는’ 것임이 쉽게 읽혔다.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는 성장했고, 성장해 가고 있었다.
그가 새롭게 택한 장소는 중국이다. 일본에서 쥬얼리 디자이너이자 가수로 활동한 이력이 있으나 해외 드라마 진출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내 안방극장을 강타했던 ‘소문난 칠공주’가 3년 전부터 중국 호남TV를 통해 방영됐고, ‘연하남’ 캐릭터의 인기가 곳곳으로 퍼지면서 올해부터 현지 관계자들을 만났다. 귀공자풍의 세련된 외모와 캐릭터를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높은 점수를 받아 단숨에 ‘첸둬둬의 결혼이야기’ 남자주인공 ‘쉐페이’ 역을 꿰찰 수 있었다.
“새로운 모습으로 인사드리게 돼 저도 설레고 반가워요. 사실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를 시작으로 ‘하늘만큼 땅만큼’ ‘에덴의 동쪽’ ‘열혈장사꾼’까지 여러 작품을 거치면서 연기에 대해 어느 정도 능숙해졌구나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중국이라는 새로운 장소에 와서 촬영해 보니 전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더라고요. 많은 걸 배워간다는 마음으로 작품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있어요.”
한국 유학생 출신이자 디자인 회사의 본부장인 ‘쉐페이’ 역으로 중국인 앞에 정식으로 서는 박해진. 촬영 현장에서 만나본 ‘첸둬둬의 결혼이야기’의 왕진썽 감독은 로맨틱 드라마에 어울리는 깨끗한 이미지에 매료돼 캐스팅했다고 털어놨다. “배우 선정 과정에서 고심이 많았습니다. 연기를 잘하면서도 인기 있는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박해진 씨가 바로 그런 사람이더라고요. 특히 부드러운 남자 ‘쉐페이’와 잘 어울려서 적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중국에서 첫 작품인데요. 성장 가능성이 엿보이는 배웁니다.”
‘쉐페이’를 짝사랑하는 ‘옌웬’ 역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는 황사오레이는 박해진의 장점에 대해 내면 연기, 친절함, 성실함을 꼽았다. “‘소문난 칠공주’를 즐겨 보는 친구들이 많아서 저도 그 드라마를 접할 기회가 있었죠. 실제로 만나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생기고, 친절하더라고요(웃음). 특히 감정을 처리하는 연기가 좋더라고요. 표현력이 풍부한 것 같아요. 습득하는 속도도 빨라서 뭐든 금방 익히고요. ‘아 나도 저런 모습은 배워야지’ 할 정도로 큰 자극이 되고 있어요. 언어가 통하진 않지만 눈빛과 시선을 충분히 느낄 수 있어서 촬영하는데 전혀 어려움은 없었어요. 저의 짓궂은 농담에도 잘 웃어주는 넉넉한 마음도 매력적이고요.”
중국의 유명 여배우이자 ‘첸둬둬’ 역을 맡은 리샤오란도 현장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존재감을 높이 평가했다. “처음 볼 때는 차가운 얼음왕자 같았죠. 그런데 막상 생활해 보니 누구보다 활발하고 웃음 분위기를 잘 만들더라고요. 지금은 친절한 ‘꽃미남’으로 느껴져요(웃음).”
근면과 성실을 높이 산 황사오레이의 말마따나 박해진의 손에는 한시도 대본이 떠나지 않았다. 최종 대본은 그가 직접 고친다. 극중 한국인 유학생이라 한국어로 대사를 소화하기 때문에 중국어 대본을 번역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통역사가 한국어 대본을 만들어 주면, 박해진은 극중 상황과 캐릭터에 맞게 대사를 수정한다. 거듭된 연습과 반복을 통해 정교한 ‘쉐페이’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지난 5년간 국내에서의 활동, 고통과 성숙의 시간을 지나 중국에서 제2의 인생 서막을 열어젖힌 박해진. ‘비상하다’는 뜻이 담긴 극중 캐릭터 ‘쉐페이’는 그의 날갯짓을 축하해 주는, 우연을 가장한 선물이 될 듯하다.
베이징(중국)=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은주 기자 kim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