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정치]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은 부산 부민동에 있었다. 수수하다 못해 조금 허름한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그 분을 처음 만났다. 그때까지 내가 만나 본 법조인들과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아주 소탈했고 솔직했고 친근했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내가 학창시절 데모하다 제적당하고 구속됐던 얘기, 그 때문에 판사 임용이 안 된 얘기…. 노 변호사는 자신이 변론했던 ‘부림사건’ 경험을 얘기하면서, 그런 일로 판사 임용이 안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함께 분노해 주었다. 함께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고 했다. 따뜻한 마음이 와 닿았다. 그날 바로 같이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 만남이 내 평생의 운명으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의 ‘마지막 비서실장’인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그렇게 처음 만났다. 당시 노 전 대통령에게 문 이사장을 소개해준 인물은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다. 박 전 수석은 노 전 대통령과 고시공부를 함께 했고, 문 이사장과는 사법연수원 동기라는 인연이 있었다. 박 전 수석의 주선으로 두 사람은 1982년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개업한 이래 2009년 5월 23일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친구이자 동지로서 한 시대를 동행했다.
문 이사장이 14일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증언록이자 자서전인 ‘문재인의 운명’(가교출판)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그가 노 전 대통령과 인권변호사 일을 함께 하며 당시 관행이었던 사건수임 소개비(커미션)와 판·검사 접대를 딱 끊었던 과정을 비롯해 여러 일화들이 담겨있다. 또 문 이사장이 청와대 민정수석,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지내며 겪은 대북송금 특검, 이라크 파병, 대연정 제안, 남북 정상회담 등 역사적 사건들에 얽힌 비사(秘史)와 소회가 충실하게 소개돼 있다. 방대한 양의 문 이사장 녹취와 증언을 양정철 전 청와대 홍부수석기획관이 꼼꼼히 정리해 자료로 만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당시 부산 선거대책본부(문 이사장이 본부장이었다) 출범식 후보연설 때 “사람은 친구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문 이사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실제로는 나이도 여섯 살 차이가 나고, 고시도 5년 위면 대선배다. 그런데 그 말씀 덕분에 나는 지금도 과분하게 ‘노무현의 친구’라는 호칭을 듣고 있다. 노 변호사는 처음부터 나를 많이 존중해줬다. 내게 늘 높임말을 썼다.”
책에는 문 이사장의 남다른 개인사도 담겨 있다. 고교 때 ‘문제아’로 찍혀 유기정학을 당한 경험, 경희대 법대 재학 중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해 구속된 일, 강제징집돼 특전사 공수부대에서 31개월 간 군 복무를 했던 체험, 복학 후 다시 학생운동을 하다 현재의 부인과 장인 등 처가 식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수갑이 채워져 연행됐던 일화,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하면서 법무부장관상까지 받았는데도 판사 임용에서 탈락했던 사정 등이 흥미롭다.
그는 운동권 출신임에도 특전사 시절 특출한 재능을 발휘해 ‘군대 체질’ ‘공수부대 체질’이라며 말뚝 박으라는 농담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폭파 주특기를 받아 특전사령관으로부터 폭파 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고, 수중 침투훈련을 통해 고급 인명구조원 자격을 취득했으며, 상병 때 발생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미루나무 제거조로 투입되기도 했다.
책에는 문 이사장과 고락을 함께 했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가 경희대 총학생회 총무부장이었을 때 총학생회장이 훗날 신한국당 사무총장, 한나라당 부총재 등을 지낸 강삼재 전 의원이다.
“직선제로 선출된 총학생회가 앞장서서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하자 엄청난 규모의 학생들이 운집했다. 학생처 집계로만 5000명이 넘었던 것 같다. 경희대생 전체가 7000∼8000명 규모일 때였다. 학생들이 다 모였는데 총학생회장이 오질 않았다. 학교로 오다가 경찰에 붙잡혀 예비 구금됐다고 했다. 총무부장인 내가 총학생회장 대행으로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했다.(중략) 경찰이 갑자기 페퍼포그를 발사했다. 최루탄도 일제히 쏴댔다. 맨 앞에 있던 내가 페퍼포그 발사구에서 뿜어져 나온, 확산되기 전의 가스를 얼굴 정면에 맞았다. 순간 정신을 잃었다. 학우들이 후퇴하다가 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되돌아와 나를 학교 안으로 옮겼다. 오후 늦게 총학생회장이 경찰의 눈을 피해 겨우 도망쳤다며 맨발 차림으로 학교에 왔다. 그때부터 시위 마무리를 그에게 맡기고 쉴 수 있었다.”
대학 시절 그의 사회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작고한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였다. 그는 리 전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발간되기 전, 그 속에 담긴 ‘베트남 전쟁’ 논문을 잡지 ‘창작과 비평’에서 먼저 읽고 큰 충격과 감명을 받았다. 나중에 리 전 교수를 만났을 때 에피소드가 있다.
“우리가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를 할 때 리영희 선생 초청강연회를 두세 번 한 적이 있다. 뒤풀이 자리에서 내가 리영희 선생에게 질문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 오류가 아니었는지’라고. 그는 망설임 없이 분명하게 대답했다. ‘오류였다. 글을 쓸 때마다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는데, 그 시절은 역시 자료접근의 어려움 때문에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또 그 때는 정신주의에 과도하게 빠져있었던 것 같다.’ 그 솔직함이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임기 내내 맹렬하게 공격했던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눈길을 끈다.
“부민협 창립대회를 하는 날이었다. 행사는 1부 강연회, 2부 창립대회로 예정돼 있었다. 1부 강연 연사가 조갑제씨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국제신문 해직기자로서 지역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경찰이 행사장인 강당을 원천봉쇄해 1부 강연회부터 아예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모두 경찰의 원천봉쇄의 불법성을 규탄했다. 그래도 경찰이 꼼짝 않자 노 변호사는 대로(大路) 바닥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혼자서 구호를 외치며. 경찰의 불법적인 원천봉쇄에 점잖게 항의하는 시늉만 하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게 그분 생각이었다.”
참여정부 첫 조각 때 이용섭 관세청장을 초대 국세청장에 파격 발탁한 것은 당시 정무수석을 맡고 있던 문 이사장의 아이디어였다. 이 청장은 노 전 대통령 측과 전혀 인연이 없었고, 문 이사장도 알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청장의 개인 업무평가와 부처 혁신평가가 대단히 좋은데다 지역 안배상 호남 출신이라는 점도 고려해 인사회의에서 문 이사장이 추천했고, 노 전 대통령도 좋아했다고 한다. 이 청장은 이후 청와대 혁신관리수석, 행자부 장관, 건교부 장관 등으로 계속 중용됐다. 이 청장은 현재 민주당 대변인을 맡고 있다.
문 이사장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때 검찰과 언론에 대해 느낀 감정도 토로했다.
“이인규 중수부장이 대통령을 맞이하고 차를 한 잔 내놓았다. 그는 대단히 건방졌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태도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검찰 조사를 지켜보면서 검찰이 아무 증거가 없다는 걸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대통령과 박연차 회장의 말이 다른데 박 회장의 말이 진실이라고 뒷받침할 증거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통화기록조차 없었다. 통화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검찰을 장악하려 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보장해 주려 애썼던 노 대통령이 바로 그 검찰에 의해 정치적 목적의 수사를 당했으니 세상에 이런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뇌물로 받은 1억원짜리 시계를 논두렁에 갖다 버렸다는 ‘논두렁 시계’ 소설이 단적인 예이다. 사법처리가 여의치 않으니까 언론을 통한 망신주기 압박으로 굴복을 받아내려는 것 같았다. 언론은 기꺼이 그 공범이 됐다. 무엇보다 아팠던 것은 진보라는 언론들이었다. 기사는 보수언론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칼럼이나 사설이 어찌 그리 사람의 살점을 후벼 파는 것 같은지, 무서울 정도였다. 그렇게 날카로운 흉기처럼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는 글을 쓴 사람들이 자신의 글에 대해 반성한 것을 보지 못했고, 글쓰기를 자제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문 이사장은 현재 야권 일각에서 유력 대선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책 끝 부분에는 그의 향후 행보를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노 전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했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 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기 못하게 됐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