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문화] 몇 달 전 가난한 젊은 여성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우리들의 가슴을 저리게 했던 기억이 오랜 옛일처럼 벌써 가물가물하다. 그때는 온 매스컴이 한동안 들썩거리는 모양을 보면서 ‘그래도 좀 낫다는 영화계가 저럴진대, 공연계는 말해 무엇하랴’ 하는 감상(感傷)이 떠나질 않았었다.
우리는 늘 ‘예술가는 춥고 배고프다’는 말을 귀에 박히듯 들어 와서 그걸 당연한 듯이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때 우리나라 헝그리복서들이 세계 챔피언을 줄줄이 ‘먹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래서 복싱은 배고픔과 관련 있다는 믿음이 강했다. 몇 몇 가난 속에서 떠오른 성공한 예술가들의 사례를 들어 ‘예술도 배가 고파야 나온다’는 그럴싸한 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국민 거의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대략 먹고 살만해진 요즘에도 예술가는 왜 가난하다고 할까? 네덜란드의 경제학자이자 미술작가인 한스 애빙은 ‘예술가는 왜 가난해야 할까’라는 책에서 그 이유 중 하나를 이렇게 설명한다. “권위의 상징인 정부지원을 받는 예술가들을 보고, 너도 나도 예술가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러나 예술계는 ‘승자독식‘의 성격이 강해서 일부만 그런 혜택을 받게 되거나 소득이 높아지고, 나머지 파이를 나누어야 하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숫자가 늘어난 만큼 더 가난해 진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술계의 특성을 말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스포츠분야도 그렇다. 한 때 박세리가 미국에서 활약하는 것을 보고 골프 지망생이 크게 늘어난 적이 있다. 이 ‘박세리 키즈(kids)'' 들이 지금 미 LPGA에서 역시 맹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망생들 중에 미국 LPGA에 진출하는 이는 극히 소수이다. 다른 대다수는 고소득의 유명 선수 대열에 끼지 못하거나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의 가난은 예술만이 가지는 독특한 구조에서 찾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45년전 미국의 두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시장실패’ 이론이 아직 공연예술계에서 인정하는 권위 있는 것으로 통한다. 이들에 의하면 “자동차 같은 모든 기술집약적 산업은 기술이 발달하고 부품이 표준화되면서 생산원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거나 적어도 꾸준히 올라가지는 않지만, 예술-특히 연극, 무용, 음악 등 공연예술-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라 인건비의 비중이 높아서 그 제작비는 계속해서 상승하게 되므로 시장에서 경쟁력이 낮고, 따라서 누군가 지원하지 않으면 적자폭이 점점 커져서 시장에서의 존립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이론도 있다. 지난 칼럼에서 이야기한 서비스 상품의 특성에는 ‘생산과 소비의 불가분성’이라는 것이 있다. 예술 중에서도 특히 공연예술은 예술가들의 공연을 관객들이 동시에 관람하는, 생산과 소비가 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속성 때문에 한 번에 정해진 객석만큼만 티켓을 팔수밖에 없다. 영화가 전 세계 수만 개의 영화관에서 하루에도 많게는 수백만 장의 티켓을 팔 수 있는 것에 비하면 그만큼 경제적으로 불리한 상품이다. 이런 것들이 공연예술가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요소들인 것이다.
물론 모든 공연예술가들이 다 가난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분야에서처럼 ‘승자독식’을 하는 부자 공연예술가도 있다. 그러나 그 수는 많은 가난한 이들의 수에 비할 바가 아니다. 특히 소수의 부자는 놀랄 만큼 부자이고(물론 이들도 제조업 분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다수의 가난한 이들은 놀랄 만큼 가난하다. 아마도 자존심이 강하거나 장래의 (허망한) 가능성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렇게 까지는 아니 하지만, 법적 기준으로만 따지면 이 분야야 말로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해야 할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이 될 것이다.
그래서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예술분야에 대한 기부도 많다. 누군가 지원하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부 현실은 우리가 다 짐작하다시피 아주 미미하다. 엊그제 어느 신문이 한 대학교수의 논문을 빌어 “우리나라의 GDP대비 (사회복지, 의료, 대학 등에 대한) 개인기부 총량 비중은 0.54%로 미국의 1.67%에만 크게 뒤질 뿐 OECD국가들 가운데 중간쯤 차지하고 있는 등 결코 적지 않은 규모”라는 기사를 다뤘다. 그 규모가 연간 10조원에 이른다는 숫자도 제시했다. 그런데 이 중 예술분야에 대한 기부는 어느 정도일까? 개인기부가 총 5조 원가량일 때 예술분야에 대한 그것은 23억 원으로 나와 있는 자료를 필자는 본적이 있다.
미국은 물론 예술분야에서도 개인기부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로 그 규모가 얼핏 우리나라 전 분야의 기부액과 맞먹는 10조원 가까이에 이른다는데, 아무리 나라의 경제규모나 기부문화가 다르다 해도 우리는 그야말로 ‘새발의 피’다. 거기까지 기대하기는 또한 허망한 일일 것이다. 그보다 얼마 안 되는 공연장 객석이라도 관객으로 채우기 위해 오늘도 공연예술가들은, 예술경영자들은 노심초사 하고 있다.
이용관(한국예술경영연구소장/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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