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덕분에 대박 난 남자

‘문재인’ 덕분에 대박 난 남자

기사승인 2011-09-16 11:24:01

“3년 동안 3억원을 가장 확실하게 날릴 수 있는 방법은 출판사를 차리는 것”이라는 출판계 속설이 있다. 출판계에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또 공감하는 말이다. 책 한권 펴내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적게는 1000만원에서 많게는 3000만원 정도. 여기에 사장, 편집부 1명, 영업부 1명, 관리부 1명으로 구성된 기본 편성의 출판사 한 달 운영비가 급여를 포함해 최소 1000만원이다. 따라서 1년에 책을 5권 출간한다고 치면 들어가는 비용이 2억원에 육박한다. 3년 안에 3억원은 가뿐하게(?) 소진되는 것이다.

국내에 출판사는 몇 곳이나 될까.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에게 물으니 “지난해 말 기준으로 5만 곳”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출간되는 책의 종수는 5만종 이상이다. 이 가운데 참고서, 만화, 각종 교재 등을 제외한 순수 교양 단행본은 1만종 정도다. 1주일에 200종씩 쏟아지는 셈이다. 출판사와 책의 대범람 속에서 베스트셀러 한 권 탄생시킨다는 게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한 해에도 수백 곳의 출판사가 책을 내면 낼수록 적자만 키우다 끝내 고꾸라지고 만다.

그래서 출간 석 달도 안 된 지난 7일 자로 20만부를 돌파한 ‘문재인의 운명’은 올해 독서시장 최대 이슈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 책 권당 가격이 1만6000원이니 20만부면 단순계산으로 30억원어치 이상이 팔린 것이다. 속성상 대량 판매 사례가 극히 드문, 정치권 인사로 분류되는 저자의 자서전이기에 출판계의 놀라움은 더욱 크다. 그와 함께 이 책을 낸 가교 출판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도 커졌다. “대체 가교 출판이 어떤 곳이길래 이런 대박을 냈어?”

종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책은 주로 학고재, 돌베개, 동녘 등 유명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에 비하면 가교 출판은 무명에 가깝다. 요즘 말로 하면 ‘듣보잡’이다. 기자가 친분이 있는 출판사 편집자 몇 명에게 물어봤더니 “들어본 적도 없다. 황당하다. 어떤 출판사냐?”고 되레 질문이 돌아온다. 조금 정보가 있다는 출판인은 “주로 아동도서를 내는 곳”이라고 했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왜 하필 ‘어린이 책 전문’인 가교 출판에 자신의 의미 깊은 첫 저서를 맡겼을까. 저자만 무대에 설 뿐, 편집자는 커튼 뒤에서 자신의 역할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가교출판과 그 대표는 유독 베일에 가려져 있다. 정해운(49) 가교출판 대표를 서울 충신동 사무실에서 만나 책 출간에 얽힌 뒷얘기를 들어봤다.

노무현과의 인연, 문재인까지 이어져

-책이 나오고 ‘문재인 신드롬’이라고 불릴 정도로 언론과 국민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출판사의 정체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림자로 있어야지, 언론에 직접 나서면 안 되는데…(웃음). 출판계에서 일한 지 30년 됐다. 지금 회사를 차린 건 1992년이다. 어린이 관련 책을 많이 냈다. 난해한 글로 유명한 시인 이상(1910∼1937)이 죽기 얼마 전 병원에서 ‘황소와 도깨비’라는 동화를 썼는데, 그걸 내가 발굴해서 출간한 적이 있다. 그럭저럭 먹고사는 출판사였다. 현재 직원은 나 빼고 3명이다. 사실 웃기는 얘기일 수 있지. 생뚱맞게 아동물 내던 출판사가…. 허허. 나는 뚝 떨어진 낙하산이다.”

-낙하산? 혹시 노 전 대통령이나 그 주변 사람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나?

“사실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다. 내가 1990년 초반에 문학도서로 유명한 열음사에서 편집자를 거쳐 영업부장으로 일했는데, 그때 열음사 법률고문이 노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 선거(1992년 14대 총선)에서 떨어지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사무실이나 회식 자리에서 그를 여러 번 만났는데, 사람이 순수하고 소탈해서 스스럼없이 지냈다. 열음사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노 전 대통령과 화기애애하게 지냈다. 편집부장으로 일했던 노혜경 시인은 나중에 노사모 회장이 됐다. 나도 매달 회비 1만원씩 내는 노사모 초기 회원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이던 2002년 11월, 후보 캠프에서 ‘노하우에 리플달기’라는 책을 열음사를 통해 냈다. 노사모 홈페이지 등에 올라온 지지 댓글을 모아 영화배우 문성근씨 등이 엮은 책이다. 정 대표가 광고 및 영업 분야 일을 적극 도왔다고 한다. 이렇게 정 대표는 노 전 대통령 측근들과 교류하며 인연의 끈을 이어갔다.


-문 이사장 책은 어떻게 맡게 됐나.

“문 이사장과 직접적인 친분은 없었다. 문 이사장 쪽 사람한테 지난 2월에 전화가 왔다. 노 전 대통령 2주기에 맞춰 책을 내려고 하니 맡아달라고 했다. 처음부터 책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팔릴 줄 알았으면 나한테 안 줬겠지.(웃음)”

판매량 목표는 ‘유시민 넘어서기’

-이렇게 많이 팔릴 거라고 미리 짐작했었나.

“그 쪽에서 처음에 얘기한 예상 판매치가 4만권이었다. 그러면서 7만권까지 팔아보자고 그러더라. 사실 문 이사장은 필자로서 지명도가 없었다. 같은 친노(親盧) 인사지만 유시민씨 같은 경우는 옛날부터 잘 나가는 필자로 고정 독자가 많지 않은가. 그래서 내 목표는 그거였다.

‘유시민을 넘어보자.’ 유씨가 돌베개에서 낸 노 전 대통령의 사후(死後) 자서전 ‘운명이다’가 14만권 정도 나갔다. 나는 최대 목표를 15만권까지 잡았다. 기획회의 과정에서 들어보니 문 이사장이 학창 시절 상당히 거칠게 노셨더라고.(웃음) 그런 부분을 포함해서 과거를 다 까발리고 진솔하게 가자고 했다. 보통의 전기나 자서전처럼 미화하거나 영웅화하지 말고. 결국 내 목표치보다도 훨씬 많이 팔렸다.”

20만부가 과연 어느 정도 많이 팔린 걸까. 일반적으로 베스트셀러가 가장 많이 나오는 소설류와 비교해봤다. 각 출판사에 문의해보니 하반기 최대 화제작이라는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이 13만부, 작가의 이름이 곧 보증수표인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문학동네)은 7만5000부 정도 팔렸다.

대표 중견작가 최인호가 5년 만에 낸 신작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여백미디어)와, 영화화까지 결정된 정유정의 스릴러 ‘7년의 밤’(은행나무)은 각각 17만부 판매됐다. 출간 석 달밖에 안 된 ‘문재인의 운명’이 올해 나온 그 어떤 국내 소설보다 많이 팔린 것이다. 정 대표에게 돈을 얼마나 벌었냐고 물었더니 “저자 인세 10∼12%에 제작비, 광고비 등 빼면…그래도 꽤 많이 남겠네”라며 웃었다.

“이인규에 대한 분노 꼭 포함시켜라”

-책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과정에서 문 이사장이 협조를 잘 안 했을 것 같다.

“문 이사장과 5∼6회 만나 기획회의를 가졌다.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김경수 봉하재단 사무국장 등이 함께했다. 처음에 내가 제안한 책 제목은 ‘내 친구 노무현’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좋다는데 문 이사장만 펄쩍 뛰며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자기가 감히 그의 친구일 수 없다는 거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른 제목으로 했다. 문 이사장이 구술한 회고담을 양 전 비서관이 정리해서 원고로 다 만들었는데, 이 양반이 그걸 붙들고 또 한 달 반을 보냈다. 원고의 단어 하나, 문장 하나라도 노 전 대통령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된다며 계속 다듬고 윤문하느라고. 그렇게 수정하는 기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원래 서거 2주기에 맞추려던 출간이 예정보다 3주나 늦어졌다. 홍보와 판매에 상당한 차질이 있을 뻔했다. 그런 부분을 빼면 대체로 문 이사장은 잘 협조해줬다.”

-책 내용 중 문 이사장이 특전사 복무 시절 찍은 사진하고, “이인규 중수부장은 대단히 건방졌다”고 언급한 대목이 특히 화제가 됐다.

“둘 다 의도적으로 책에 넣은 것이다. 나를 비롯한 기획팀이 경남 양산에 있는 문 이사장 자택에 가서 사진첩 여러 권을 뒤졌다. 특전사 때 사진을 몇 장 찾았는데 대부분 헬기에서 낙하하는 장면, 소대원들과 단체로 찍은 장면이라 문 이사장 얼굴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중에서 문 이사장 단독 사진으로 얼굴이 제대로 나온 걸 골랐다. 이 전 중수부장 대목도 많은 비하인드 스토리 중에서 의도적으로 넣은 에피소드다. 문 이사장 본인이 가장 치욕적으로 생각하고 한이 맺혔던 부분이라 반드시 넣자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을 검찰에 소환해 쳐다보는 이 전 중수부장의 눈길이 정말 기분 나빴다고 했다.”

혹시 대학 때 운동권 출신 아니냐는 질문에 정 대표는 “고등학교만 졸업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굳이 얘기하자면 중도 성향이며, 출판업을 하면서 특정 성향에 쏠린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정 대표의 성향과는 상관없이 ‘문재인의 운명’은 상당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지지율 급등으로 야권과 진보세력이 문 이사장에게 큰 기대를 걸게 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문 이사장이 대선 출마 등을 미리 염두에 두고 책 출간에 나선 건 아닐까.

“전혀 아니다. 책을 기획하고 제작할 때부터 본인은 직접 정치할 생각이 없다고 굉장히 완강한 모습을 보였다. 책이 나오면 사람들이 분명 문 이사장의 정치적인 의도를 따질 텐데 어떡할 거냐고 물었더니 ‘아이 저는 (선거에) 안 나갑니다. 생각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나도 그가 정치를 안 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그는 무뚝뚝하면서도 순진한 아이 같은 측면이 있고, 착한 선생님 같기도 하다. 청렴결백한 옛 선비의 모습도 있다. 나는 문 이사장이 정치를 하는 것보다는 품위를 지키면서 선비로 사는 게 본인의 삶에는 훨씬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왜 강남·서초·송파구서 많이 팔릴까?

‘문재인의 운명’을 어떤 층이 사보는지, 교보문고에 구매 분석을 의뢰했다. 성별로 보면 남성(59.4%) 구매자가 더 많았지만, 정치·사회 분야 도서치고는 여성(40.6%) 비율도 꽤 높은 편이었다. 연령별로는 40대(34.8%)-30대(33.5%)-20대(13.8%) 순이었다. 정 대표는 “처음에는 젊은 층 구매자가 거의 없었는데 갈수록 연령대가 내려갔다”고 전했다.

전국 시·도별 집계를 보니 서울(39.2%)과 경기(20.2%)를 제외하곤 문 이사장의 본거지인 부산(6.7%), 경남(5.8%)에서 구매 비율이 가장 높았다. 호남권 수치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시·도 가운데 서울 지역을 구 단위까지 조사해봤다. 뜻밖에 한나라당 지지성향이 압도적인 것으로 알려진 강남구(10.5%), 서초구(7.9%), 송파구(7.8%) 등 이른바 강남 3구에서 오히려 구매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 대표에게 알려줬더니 웃으면서 “적을 알고 나를 알자는 차원인가?”라고 농반진반의 분석을 내놨다.

이 책은 문 이사장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노무현 정권의 조연이 아닌, 현 시점 야권의 주연으로서 말이다. ‘문재인의 운명’은 궁극적으로 어떤 운명을 맞을까. 이 책이 내년 대선을 전후해 뜨겁게 재조명될지, 아니면 용도폐기 상태로 완전히 사장(死藏)될지 여부는 결국 문 이사장의 정치적 선택에 달려있을 것이다.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
김호경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