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9월 만난 원로 배우 이순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 작가 작품이면 무조건 출연한다’고 말할 만큼 믿음이 가는 작가가 있는지. 돌아온 답변은 이러했다. “당연히 김수현 작가다. 그 양반한테 발탁되는 건 배우에게 행운이다. 김 작가는 드라마 장르를 이해하고 있다. 시청자 기호를 다 계산한 뒤 딱딱 치고 나간다. ‘이래도 내 드라마 안 볼 거야?’ 이런 느낌을 줄 정도다. 시청자들 반응 보고 작품 내용 바꾸는 여타 장사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2. 지난달 30일, 한 네티즌이 트위터를 통해 김수현에게 부탁했다. “‘천일의 약속’을 보고 싶어도 말이 너무 거슬려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수현은 ‘천일의 약속’을 ‘외면’하라고 응수하며 “나한테 말투 고치라는 건 가수한테 딴 목소리로 노래하란 겁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내 대사가 바로 김수현이니까요”라고 적었다.
SBS 월화극 ‘천일의 약속’이 신드롬을 일으킬 기세다. 가장 오래되고 낡고 통속적인 정통 신파극에 나이 어린 20대 시청자들까지 열광하고 있다. 시청률은 아직 10% 후반대로 20% 고지를 넘어서진 못 했지만 체감인기는 이미 그 이상이다.
이 같은 열기의 중심엔 ‘언어의 마술사’ ‘드라마의 신(神)’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 일흔을 바라보는 베테랑 작가 김수현(68)이 있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김수현은 뚝심과 내공이 느껴지는 이야기의 힘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쥐락펴락한다.
지난 1일 6회까지 방송된 ‘천일의 약속’ 줄거리는 간단하다.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서연(수애)을 위해 약혼녀까지 버린 지형(김래원)의 순애보. 그런데 극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여느 드라마와 다르다. 예컨대 시간에 따라 서연과 지형의 사랑이 싹트고 무르익고 이별을 맞는 식의 작법을 이 작품은 따르지 않는다. 이별의 장면을 먼저 보여준 뒤 두 사람의 만남을 역추적하는 식이다.
스타카토처럼 통통 튀는 대사는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치매 증세가 심해진 서연이 기억에서 지워지는 ‘형광펜’ 같은 단어를 외치며 악쓰는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을 베고 지나간다. 선악의 이분법적 틀로 인물을 나누지 않고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솜씨도 단연 일품이다.
국내 드라마 작가 16인을 분석해 지난달 발간한 책 ‘올 댓 드라마티스트’에서 신상일 서울예대 겸임교수는 ‘인간의 길을 묻는 작가 김수현 이야기’라는 글을 통해 김수현을 이렇게 평가했다.
“김수현은 인간에 천착하고 인간을 관찰하는 데 탁월했다… 특정 소수라기보다 불특정 다수에서 등장인물을 골라내고 있었다. 그들을 살아 움직이는 현실의 인물로 만드는 데 천재적이었다.”
이런 격찬은 ‘천일의 약속’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전문가들의 호평은 줄을 잇는다.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학과 교수는 “시청자들에게 철학적 성찰을 하게끔 만드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윤 교수는 “다른 드라마는 불치병이라는 소재를 선정적으로 다루는 데만 급급하지만, 김수현은 이걸 통해 사람들이 ‘기억’ ‘사랑’ 등을 반추하게 만든다”며 “인물들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능력, 극단적인 설정을 풀어내는 구성력도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