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 제도 시행 이전에 유죄가 선고됐던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전자발찌 부착 소급 청구가 잇따라 기각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 이후 서울중앙지법은 대상자 9명 중 6명에 대한 전자발찌 소급 부착 청구를 기각한 것으로 확인됐다. 전국 최대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의 잇단 기각결정으로 입법 당시부터 ‘이중처벌’과 ‘인권침해’ 논란이 일었던 전자발찌 소급적용 논란이 재점화될 전망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6부(부장판사 유상재)는 2006년 인터넷 게임으로 알게 된 피해자(당시 12세·여)에게 술을 먹여 성폭행한 혐의로 복역한 A씨(29)의 전자발찌 소급 부착 청구를 기각했다고 1일 밝혔다. 재판부는 A씨에 대해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하려는 의지가 보인다”며 “전자발찌를 부착할 경우 A씨의 의지를 저하시키고 사회적 반감을 증폭시킬 우려도 있다”고 판시했다.
같은 법원의 형사29부(부장판사 천대엽)도 찜질방 휴게실에서 잠을 자던 여아를 성추행한 혐의로 8개월을 복역한 B씨에 대한 전자발찌 소급청구를 비슷한 이유로 기각했다. 재판부는 “종전 범죄의 원인이 됐던 찜질방 출입이나 음주를 자제하면서 3년 이상 다른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있다”고 기각 이유를 밝혔다.
두 재판부는 소급적용이 태생적으로 가진 위헌성을 고려했다. 헌재는 위헌 정족수(6명)에 미치지 못해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위헌 의견이 합헌 의견보다 더 많았다. 청구 대상자들이 이미 형을 마치고 사회로 복귀한 상태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각 사안에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다. 두 재판부의 결정은 전국 각 법원에 걸려 있는 2000여건의 소급청구 사건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법원, 전자발찌 소급 적용 결정 핵심 기준은… 출소후 생활이 잣대, 성실한 삶 이어가야 “기각”
전자발찌 소급 적용을 결정하는 법원 판단의 핵심 기준은 ‘현재 생활’이다. 대상자들이 형을 마친 다음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다면 소급적용을 기각하고 그렇지 못하면 발부 명령을 내리고 있다. 대상자들의 과거 죄질과 수형생활, 현재 생활환경 및 사회복귀 의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재범 가능성’을 판단하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성폭력 전담 재판부(형사26부·29부)는 지난달 전자발찌 소급적용 피청구인들을 모두 법원에 불러들였다. 재판장들은 이들에게 현재 생활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H씨(43)는 2001년 10월 경기도 고양시 한 아파트 비상계단에서 귀가하던 피해자 K씨(24·여)에게 흉기를 들이대 돈을 빼앗고 성폭행한 뒤 “나체 사진을 찍었으니 300만원을 송금하라”고 협박했다. H씨는 징역 7년을 선고받고 2008년 10월 만기 출소했다.
H씨는 출소 후 성실하게 일해 왔다고 평가됐다. 농수산물시장에서 배달 일을 하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했다. 2년간 저축한 돈으로 ‘남성전용 미용실’을 차려 운영 중이다. 그 사이 아내를 만나 새로 가정을 꾸렸고, 출소 후 4년5개월간 범죄에 연루된 적이 없다. 형사26부는 “모범적 수형생활을 했고 이를 지켜본 교도관이 탄원하고 있는 점도 고려했다”며 전자발찌 소급청구를 기각했다.
전자발찌 소급적용이 무의미한 경우도 있다. 형사29부는 여덟 살 여아를 상대로 유사성행위를 하려다 미수에 그쳐 징역 2년이 선고된 G씨(43)에 대한 소급청구를 기각했다. 중증 정신분열증으로 정신병원 입원치료를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격리 수용돼야 하기에 전자발찌를 부착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 권모(40)씨에게는 5년간 전자발찌를 착용하라고 소급명령을 내렸다. 권씨는 가정집에 침입해 돈을 빼앗고 홀로 있던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6년을 복역했다. 그러나 2009년 출소 후에도 일정한 거처와 직업 없이 혼자 생활하다 다시 강도치상죄를 저질렀다.
재판부가 이처럼 ‘신중’한 것은 전자발찌 소급적용이 내포한 위헌성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헌법재판소가 전자발찌 소급적용에 합헌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위헌 정족수(6명)에 미치지 못했을 뿐 위헌 의견이 5명으로 합헌 의견(4명)보다 더 많았다.
재판부는 “소급조항에 침해되는 신뢰이익과 그로 인해 실현하려는 공익의 비교형량을 충실히 함으로써 구체적 개별사안에서 위헌적인 법익침해 결과가 초래되지 않도록 해석상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결정문에 적시했다. 소급적용 대상자라고 해서 일률적으로 전자발찌 부착명령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는 설명이다. 또 지금까지 기각 판결을 받은 피청구인들은 헌재의 위헌심사가 길어지면서 청구 당시 소급기간의 기준이 됐던 3년 이상을 별다른 범죄 없이 살아왔다.
통상 전자발찌 발부 여부는 성폭행 재범 가능성을 가늠하는 ‘한국형 성범죄자 위험성 평가(K-SORAS)’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소급적용 사건을 다룬 재판부는 이 평가가 피청구인들의 출소 후 생활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며 무게를 두지 않았다. H씨와 G씨는 K-SORAS 결과 재범 위험성이 ‘높음’ 수준으로 나왔지만 재판부는 “이 평가 척도는 기존의 대상범죄와 범죄전력 등을 위주로 한 것이어서 피청구인의 출소 이후 생활은 전혀 반영되지 못하는 본질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결정문에서 밝혔다.
◇소급적용=이중처벌 논란, 합헌결정 이후에도 계속돼
지난 24일 법무부 자유게시판에 ‘전자발찌 관련’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살기 힘들어’라는 필명의 글쓴이는 본인을 “성폭행 관련 범죄로 7년을 복역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8개월째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는 “법원에서 전자발찌 부착명령 관련 서신이 왔다”며 “일도 하고 신용도 살려서 결혼 준비 중인 사람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다는 건 다시 죽으라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전자발찌 소급적용이 ‘이중처벌’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논란은 전자발찌 부착명령을 소급적용할 수 있도록 해당 조항이 개정되기 전부터 불거졌다. 2010년 2월 부산에서 ‘김길태 사건’이 터지면서 전자발찌법이 제정된 2008년 이전 성폭행 범죄자에게도 전자발찌를 채워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같은 해 4월 국회는 소급적용이 가능하도록 조항을 개정했고, 석 달 후부터 개정법이 시행됐다. 일각에서 ‘이중처벌’이라는 주장이 제기됐고, 2010년 9월 충주지원은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제청했다. 헌재는 2년3개월의 위헌심사를 거쳐 지난해 12월 27일 합헌결정을 내렸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위헌의견(5명)이 합헌의견(4명)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법원이 개별 전자발찌 청구건에 대해 신중히 접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법원의 판단에 대해 한국여성민우회 관계자는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건 모든 권리를 뛰어넘어서 이뤄야 할 목적은 아니다”며 “인권침해 우려가 있는 소급적용의 경우는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이 맞는다”고 말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박수현 부장은 “신중하게 접근하되 재판부가 재범 가능성이 높은 성폭력 범죄의 특성을 감안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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