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가 남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빛과 어둠

만델라가 남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빛과 어둠

기사승인 2013-06-29 00:40:01


[쿠키 지구촌] 전세계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있다. 아흔 다섯 번째 생일을 2주 앞둔 그가 생명의 경계를 오가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만델라, 남아공 흑인의 해방자, 화해와 용서의 실천자. 그를 칭송하는 말들이 쏟아진다.

세계는 왜 그를 칭송하는가

그런데, 정말, 진짜, 만델라 할아버지는 그렇게 칭송 받을만 할까? 임종을 앞둔 분께 이런 얘기를 하기가 조금 부담스럽긴하지만, 이미 살아서 역사적인 인물이 된 분이니 엄정한 평가를 해보는 것이 불경스럽기만 한 일은 아닐 것이다.

만델라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7년간 감옥에 갇혀 있을 정도로 맹렬한 투쟁으로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는데 기여한데다, 첫 흑인 대통령이 된 뒤에는 백인에 대한 보복보다는 용서와 화해를 추진한 공로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 남아공을 흑인의 나라가 아니라 흑인과 백인, 모든 인종이 어울려 사는 무지개의 나라(rainbow nation)로 만들었다. 인류 역사상 이런 일을 이룬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 나라 안에서 억압과 차별의 과거를 극복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데 어울려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멀리 갈 것 없이 올 봄 우리나라에서 광주민주화 운동을 두고 벌어진 북한 개입 논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나도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다.

만델라는 임무를 완수했는가

자, 여기까지가 그의 업적이다. 두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만델라는 어떻게 그 일을 해냈을까. 또, 제대로 해냈을까.

1993년 4월10일. 남아프리카공화국 공산당의 사무총장이자 젊은 흑인들의 전투조직을 이끌던 크리스 하니라는 인물이 한 백인 남성의 총에 맞아 숨졌다. 흑인과 백인 사이에 인종 전쟁을 일으켜 차별정책 철폐를 위한 협상을 무산시키려는 계산 속에서 이뤄진 백색 테러였다.

분노한 흑인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전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그날 밤, 차기 대통령이 유력했던(당시는 백인정권과 만델라 사이에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협상이 벌어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만델라가 TV에 출연해 이렇게 연설했다.

“오늘 밤 저는 모든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 한명한명에게, 모든 흑인과 백인에게 온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지금 우리 국민 전체가 백척간두에 서 있습니다. 슬픔과 분노에 우리가 갈갈이 찢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분수령과 같은 순간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일치단결해 크리스 하니가 목숨 바쳐 이루고자 했던 것, 즉 우리 모두의 자유를 파괴하려는 사람들과 맞서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우리 백인 동포들이 장례식과 추념식에 참석해야 할 때입니다. 전쟁을 숭배하는 사람들, 피에 굶주린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위험한 사태에 빠뜨릴 행동을 촉발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평화를 위해 싸운 크리스 하니를 위해서라도.”(넬슨 만델라,<나 자신과의 대화>)

만델라는 대통령이 된 뒤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를 설치한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과거에 정치적 범죄를 저질렀다면 청문회에 나와서 진실을 고백하라. 그러면 죄를 용서하겠다. 이것이 TRC의 컨셉이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진실과 화해를 선택한 이유

사실 만델라가 진실의 고백과 사면을 교환하는 방법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1990년부터 시작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개헌 협상에서 백인의 국민당 정권은 집요하게 인종 범죄에 대한 사면을 요구했다. 국민당은 1991년 아파르트헤이트 통치하에 이뤄진 일에 일괄적인 사면을 실시하는 법을 만들기까지 했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흑인에게 정권을 넘겨주면 대학살과 보복 같은 재난이 닥칠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이미 수백년간 이 곳에 살아온 주민들이었기에 피할 곳이 없었다. 또 남아공 군대 장교의 상당수가 백인이었다. 선거를 통해 군통수권자가 흑인이 된다고 해도, 백인과 흑인 사이에 폭력적인 대치 상황이 벌어진다면, 군대가 어느 편이 될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만델라의 정당 ‘아프리카 국민회의(ANC-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정당 이름을 ‘새정치 국민회의’라고 한 적이 있다. ANC에서 따온 이름이다.)’가 어떤 형태로든 사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타협은 이뤄지기 힘들었다.

TRC 위원장을 맡은 데즈먼드 투투 남아공 성공회 대주교는 위원회 보고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남아공에서는 해방운동 측이 제2차 대전 이후 연합국처럼 ‘승자의 정의’를 행사할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또한 전 정권 관련자들은 만일 자신이 과거 저지른 일로 혹독한 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면 협상을 깼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백인 정권에서 흑인 정권으로) 평화로운 이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실적인 이유도 컸다. 아파르트헤이트는 100년 이상 지속된 남아공의 정치 제도였기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단죄해야할 것인지 범주를 설정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남아공 경찰과 군인, 공무원은 물론 교사와 판사, 일상적인 노동자와 기업가 모두가 아파르트헤이트의 부역자가 될 판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실행한 자들이 개헌과 민주적인 선거가 치러지기 전까지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증거를 인멸할 수 있었다. 재판에서는 위원회 청문회처럼 자유롭게 진술할수 없고, 변호인이나 판사가 발언을 조율한다. 피의자는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피해자와 동등하게 취급 받으며 증거가 없는 한 자신의 거짓말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다. 만약 국제법에 따라 아파르트헤이트 범죄자들을 처벌하려고 했다면, 대부분의 피고자들이 엄격한 사법 절차 속에서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선고 받았을 것이다.

또한 이런 재판을 진행하는데는 흑인 정권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거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실제 13명의 흑인을 살상한 책임을 물어 기소 당한 전 국방장관 마그너스 말란은 위원회에 사면을 신청하지 않아 재판을 받았는데, 7개월 동안 7백만 랜드(약 13억원)의 소송 비용과 9백만 랜드의 변호사 비용이 들었다. 이 돈은 ‘국무 수행과 관련해 기소된 경우 재판 비용은 국고로 한다’는 규정 때문에 흑인 정권이 지불했다. 말란은 결국 증거 불충분 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흑인 정권이 흑인들의 집과 학교, 도로와 상수도를 개선하는 일을 미뤄두고 재판에 돈을 쏟아 붓는다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이런 상황에서 고백을 통해 진실을 밝히는 대신 사면을 베푸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ANC는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도 만델라가 현실적인 선택을 하고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들에게 이런 방안을 설득한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백인의 반발(백인들은 뻔뻔하게도 과거의 죄는 무조건 사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을 무릅쓰고 TRC를 출범시킨 것도 위대한 결정임에 틀림없다. 개인적으로 백인에게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겠는가. 그러나 만델라는 용서와 화해를 선택했다.

만델라 뒤에 남겨진 남아공의 과제

남아공 흑인들은 이제 행복한가. 당사자도 아닌데 답을 하기가 뭣하지만, 외부인으로서 남아공을 지켜본 느낌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행복하다, 그리고 불행하다.

남아공 흑인들에게 만델라는 해방의 상징이다. 백인의 억압을 이기고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래서 만델라를 생각하면 남아공 사람들은 행복하다. 남아공에선 신문과 방송도 만델라를 ‘마디바(Madiba·추장)’ 혹은 ‘타타(Tata·아버지)’‘쿨루(Khulu·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지극한 애정과 존경의 표현이다.

내가 남아공을 방문했을 때 마침 만델라의 생일이었던 적이 있는데, 신문의 1면 톱기사부터 앞 8~10면에 걸쳐서 생일 관련 기사가 도배돼 있었다. 기쁨과 축하의 메지시가 가득했다. 남아공 사람들은 만델라를 생각하면서 즐거워했다. 만델라를 생각하면 그들은 늘 승리자였다.

그럼 왜 불행한가. 만델라가 집권한 뒤에도 흑인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 더욱 나빠졌기 때문이다.

백인 정권 때에는 통행증이 없어서 케이프타운 같은 대도시에 갈 수 없었다. 이제는 통행 제한이 없어졌지만, 케이프타운의 빈민가 칼리쳐에서 케이프타운까지 가려면 2~3시간을 걸어가야 한다. 지하철을 타려고 해도 돈이 없어서 못 타는 것이다. 케이프타운 안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는 흑인은 여전히 드물다.

인종차별 정책은 사라졌고 흑인이 집권했지만 흑인의 실질적인 지위 향상이나 경제적·사회적 보장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인근 국가에서 남아공으로 유입된 흑인들을 남아공 주민들이 폭력적으로 몰아내는 흑-흑 갈등까지 벌어지고 있다. 남아공 언론은 이를 새로운 인종 범죄라고 부른다. 흑인과 백인의 싸움이 이제는 흑인과 흑인끼리의 싸움으로 바뀌었다는게 달라진 점이다.

게다가 백인들 대다수는 청문회를 거친 뒤에도 아파르트헤이트의 죄악을 자신들의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자신들이 누리는 혜택이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부당한 유산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실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흑인을 탄압한 나치 스타일의 백인은 나와 거리가 멀다.”

이런 것이 대다수 백인들의 반응이었다. TRC의 청문회가 오히려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효과도 있었다. ‘청문회에 나와 고백한 사람들은 죄인이지만, 그들이 죄인이지 모든 백인이 죄인은 아니지 않느냐, 나는 아파르트헤이트의 혜택을 받긴 했지만 사실은 좋아하진 않았다’ 이런 심리다.

게다가 경제적인 권력은 여전히 백인이 쥐고 있다. 백인들은 고급 주택단지 안에서 살고 있다. 높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주택단지 안에 들어가려면 사설 경호원들의 검문을 받아야 한다.

백인들의 거주지 밖은 치안이 더 나빠졌다. 사회적 불만과 좌절감을 가진 흑인들과 어디서 언제 부딪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갖가지 사고가 속출했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과 영국, 그리스 대표팀은 숙소인 고급호텔이 털려 짐을 몽땅 도둑 맞기도 했다.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경기장 근처에 세워둔 차량의 유리가 깨지고 차 안의 귀중품을 도난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만델라가 떠나면 남아공은 어떻게 될까. 그가 있어 행복했던 이들이 느낄 상실감을 누가 채워줄 수 있을까. 아니, 무엇으로 어떻게 채울 것인가.

만델라가 떠나면, 세계의 많은 이들은 남아공을 잊게 될 것이다. 해방과 자유의 기억도 희미해질 것이다. 그래도 남아공의 국민들은 스스로 해방과 자유를 완성해 가야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만델라를 지켜보는 남아공 국민은, 그 새로운 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 트위터 @fatty_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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