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거목들이 3일 오전 서울고법 312호 법정에 속속 모여들었다. 1976년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에 항거했던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의 재심 재판을 받기 위해서다. 함세웅·문정현 신부,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 등이 직접 법정에 나왔고,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 고(故) 문익환 목사의 아들 문성근 전 민주당 상임고문이 방청석에 자리를 잡았다. 정일형 전 의원과 이태영 여사의 아들 정대철 민주당 상임고문도 방청했다. 이들은 재판 시작 전 무죄 선고를 예상한 듯 서로 축하인사를 나눴다.
서울고법 형사8부(부장판사 이규진) 심리로 재판이 시작되자 법정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1976년 재판 당시 ‘1심의 형이 너무 가볍다’며 항소했던 검찰은 무죄를 구형했다. 함세웅 신부는 최후진술에서 “당시 통치권자와 행정·사법부의 모든 분들이 역사와 국민 앞에 진실하게 사죄해야 한다”며 “우리뿐만 아니라 고생한 모든 분들을 위해서 재판부가 위로와 속죄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문동환 목사는 “법정에 다시 서게 되지 않는 그런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김 전 대통령 등 15명의 민주화 인사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의 위헌성에 대해서는 말씀드리기 조차 부끄러울 정도”라며 “피고인들의 인권을 위한 헌신과 고통이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기틀이 됐다”고 밝혔다. 이어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보상과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재심 판결에 당사자들에 대한 깊은 사죄와 존경의 뜻을 담았음을 알아달라”고 말한 뒤 고개를 숙였다. 방청석에서는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재판은 선고까지 20여분 만에 속전속결로 끝났다. 재판부는 존경의 뜻을 표하는 의미에서 주문을 낭독한 뒤 법정을 떠나지 않고 피고인과 재심청구인이 모두 나갈 때까지 법대에 앉아 기다렸다.
이희호 여사는 선고 후 “남편이 수감됐던 병원 병실은 창문에도 비닐을 붙여 하늘도 쳐다볼 수 없게 만들었다”며 “돌아가신 남편이 이 사실(무죄선고)을 안다면 하늘나라에서도 기뻐하리라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앞서 김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등은 1976년 명동성당에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철폐하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한 혐의(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 등으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