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쌀시장 전면개방으로 가닥=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16일 “현행법상 통상업무를 하면서 국회 사전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지만 쌀 시장 관세화 문제는 국회 비준이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어 국회 동의 절차를 밟기로 했다”고 말했다.
쌀은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따라 원칙적으로 모든 나라가 시장을 개방해야 하는 품목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필리핀, 일본 등은 특수성을 인정받아 유예기간을 가졌다. 우리는 10년간 두 차례(1995~2004년, 2005~2014년) 개방이 유예됐다. 대신 일정물량을 의무 수입해왔다.
올 연말로 관세 유예 기간이 끝나므로 재협상을 통해 유예를 지속할지, 개방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정부는 다른 세계무역기구(WTO) 국가들이 추가 유예에 동의해줄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다. 필리핀의 경우 최근 5년간 쌀 관세화 의무를 추가 유예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WTO 상품무역이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무수입물량을 2.3배 늘리고 쌀을 제외한 다른 품목의 관세를 인하하는 등 상당한 조건을 제시했으나 다른 회원국이 추가 관세 유예에 반대한 것이다. 정부는 이런 분위기로 볼 때 우리나라가 추가 관세 유예 조치를 얻어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있다.
정부는 이에 따라 오는 9월 WTO에 제출할 수정 양허표에 관세율을 표시할지를 고심하고 있다. 그 전에 국회 동의를 받겠다는 건 쌀 시장 개방에 무게를 두고 공감대를 형성하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산업부 관계자는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쌀 관세화가 국익에 더 유리하다는 공감대가 국회 내에 상당 부분 있는 만큼 아예 협의가 되지 않을 사안은 아닐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WTO에서 연말까지 추가 관세 유예 인증을 받지 못하면 당장 내년 초부터 쌀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 시한이 정해져 있는 문제인데다 WTO 인증 과정도 시간이 걸려 국회의 사후 비준이 개방 여부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의무수입량=우리나라는 올해 쌀 40만8700t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한다. 두 차례 쌀시장 개방을 미루면서 선택한 의무수입 물량이다. 관세화를 통해 쌀시장을 전면 개방할 경우 이 의무수입량은 40만8700t으로 고정된다. 그러나 개방을 미룰 경우 매년 2만t씩 의무수입량이 늘어난다. 지난해 쌀 생산량은 423만t였다. 현재 국내 생산량의 10% 정도를 차지하는 의무수입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되면 쌀 생산 기반이 붕괴될 가능성마저 제기된다.
필리핀이 제안한 방식으로 계산하면 2025년 의무수입량은 94만t에 이르게 된다. 지난해 기준 국내 생산량의 22.2%를 차지하는 비중이다. 그러나 벼농사 면적이 지속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의무수입량의 비중은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게다가 1인당 쌀소비량도 꾸준한 내리막을 걷고 있어 국내 쌀 농가에겐 부담이 크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의무수입량을 더 늘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전농 등 농민단체와 시민단체들은 식량주권을 지키기 위해 쌀 시장 전면개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46개 농민·시민단체는 ‘먹거리 안전과 식량주권 실현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를 결성해 쌀시장 개방 반대에 나섰다.
범국본은 “먹거리 주권을 지키지 못하면 건강을 빼앗기고, 쌀을 지키지 못하면 식량주권을 빼앗긴다”고 주장했다. 김영호 전농 의장은 “지금 쌀이 많이 부족한 상태임에도 정부는 이 같은 사실을 국민들한테 알리지 않고 있다. 쌀이 부족하면 식량주권 뿐만 아니라 농민들 생존이 모두 무너진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쌀 자급률은 86%에 그쳤다.
전면 개방 이후 수입산의 시장 잠식 가능성도 논란거리이다. 정부는 고율관세를 부과하면 수입 쌀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농민단체들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굵직한 무역협정을 통해 언제든 관세는 낮아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선정수 권기석 기자 j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