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팅이 괜찮네.”
영화 ‘상의원’ 개봉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그리고 좀 의아했다. “한석규(50)가 왕이 아니잖아?” 어좌에는 배우 유연석(30)이 앉았다. 고수(36)도 출연했는데 차림이 생경하다. 왠지 뻔한 사극은 아닐 거라는 생각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한석규는 SBS ‘뿌리깊은 나무’(2011)에서 세종대왕을, SBS ‘비밀의 문’(2014)에서 영조를 연기했다. 이번 영화에서는 30년 동안 왕실의 옷을 지은 상의원 침장 조돌석 역을 맡았다. 그가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이 초반엔 좀 낯설다. 그러나 전작들에서의 이미지는 상영시간 127분이 흐른 뒤 머릿속에서 흐릿해진다.
고수의 연기변신이 눈에 띈다. 잘생긴 외모로 스타가 됐으나 오히려 발목을 잡혔던 배우다. 그간 여러 출연작에서 고수는 적당한 카리스마와 부드러운 이미지를 잃지 않았다. ‘상의원’에서는 달랐다. 미남배우라는 틀을 한꺼풀 내려놓고 자유분방한 천재 디자이너 공진이 됐다.
유연석에게 사극 출연은 처음이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2013)로 스타덤에 오른 그는 자상한 칠봉이 캐릭터로 여성 팬들을 설레게 했다. 청춘스타쯤으로 남을 수 있었으나 욕심을 더 냈다. 연기 폭을 넓히려는 노력이 ‘상의원’ 출연으로 이어졌다. 왕 역할에서 오는 부담감은 패기로 맞섰다.
11일 서울 광진구 아차산로 롯데시네마 건대입구관에서 열린 시사회를 통해 언론에 처음 공개된 ‘상의원’은 소재부터 신선한 작품이다. 단순한 왕실 이야기가 아니라 의복을 만드는 관청이었던 상의원에 주목했다. 상의원을 총괄하는 어침장 조돌석(한석규)이 궐 밖에서 옷 잘 짓기로 소문난 천재 디자이너 이공진(고수)을 만난 뒤 겪는 감정변화에 초점을 맞췄다.
내용만 특별한 게 아니다. 영화 곳곳에 유머러스한 장치를 넣어 일반적인 사극과 차별화했다. 퓨전 사극으로 봐도 무방하다. 다만 재미와 흥이 넘치는 초반에 비해 잔뜩 무거워지는 후반 분위기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진다.
공진은 단조로운 한복에 색다른 디자인을 가미한 파격을 시도한다. 주 고객층인 기생들에게 화려한 옷을 지어주며 유명세를 떨친다. 우연한 계기로 왕(유연석)의 의복을 만들게 됐는데 썩 잘해냈다. 왕의 신임을 받은 공진은 상의원에 들어가 일하게 된다.
바늘을 처음 잡은 이후 노력 하나로 최고 자리에 오른 돌석은 공진을 보며 질투를 느낀다. 해맑은 성격의 공진은 순수한 마음으로 돌석을 존경하지만 돌석의 열등감은 점점 커진다. 공진이 왕비(박신혜)와 점점 가깝게 지내며 자주 옷을 지어주자 돌석은 더 불안감을 느낀다.
한석규는 돌석의 복잡한 내면을 세세하게 표현했다. 대사와 표정, 눈빛연기는 두말할 것 없다. 오랜 바느질로 곪아버린 손가락에까지 돌석의 일생을 담아냈다. ‘상의원’에서 한석규의 역할은 단순히 연기를 잘하는 것만이 아니다. 무거운 존재감으로 영화의 중심을 잡았다. 그를 중심으로 후배 배우들은 각자의 연기를 펼칠 수 있었다.
특히 영화 ‘백야행’(2009)에서 만났던 고수와의 호흡이 빛을 발했다. 연기에 부담을 내려놓은 듯 자유롭게 연기한 고수의 힘도 컸다. 다만 유연석과의 투샷에선 둘 사이 무게감의 차이가 어쩔 수 없다.
초반 유연석의 연기는 다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하다. 하지만 점점 나아지는 모습이다. 후반 신하들에게 호통을 치고 왕비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장면은 한층 자연스럽다. 한석규는 시사회 이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연석아, 잘했어”라고 칭찬했다. 촬영을 하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선후배간의 원활한 소통은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나왔다.
이원석 감독은 “옷에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나는 작품”이라고 영화를 소개했다. 화려한 한복들이 등장해 눈을 즐겁게 하지만 인물들의 심리가 더 중요하게 그려진다는 얘기다. 감독의 의도를 성실히 수행한 배우들의 공이 크다. 꽤 훌륭하게 그려진 인물조합이 인상적이다. 오는 24일 개봉.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