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조현우 기자] 묵직하다. 영화 ‘대호’ 첫 느낌은 그랬다. 어려웠다. 곱씹을수록 더욱 그랬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느렸다. 아니, 느려도 너무 느렸던 것 같다. 조미료 범벅인 영화에 익숙해진 탓이다.
본보 8일자 리뷰는 “예전부터 한반도에서 ‘산군’이라고 불리며 짐승 그 이상의 존재로 취급돼왔다”며 호랑이에 집중했다. 이어 “신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가지고 인간을 대하는 조선 호랑이들은 한국 설화에서 일종의 클리셰 같은 존재”라면서 “‘대호’는 이 호랑이를 인간을 압도하는 대자연으로 묘사한다”고 강조했다.
영화 제목에서부터 대다수 리뷰에 이르기까지 100%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호랑이는 아주 자연스럽다. 역대급 구현이라는 예찬이 나올 법하다. 호랑이 움직임도 무척 사실적이다. 갑자기 습격하는 모습에선 심리까지 그려내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하지만 ‘대호’를 호랑이가 나오는 영화 정도로 가둘 수는 없다. 산군과 늙은 포수, 늙은 포수와 아들, 산군을 노리는 일본군, 산군에 동생을 잃은 포수 등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다. 동물을 소재로 삼았지만 결국 사람 이야기다.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 각본을 쓰고 ‘신세계’를 연출한 박훈정 감독은 이야기를 굳이 비틀지 않았다. 자극적인 소재에 속도감 있는 전개로 다가오는 영화들과 아예 궤를 달리한다. 맛에 비유하자면 평양냉면 같다. 느리지만 묵묵하게 자연을 훑는 스크린은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반전에 신경쓰느라 예민하게 보지 않아도 된다. 책 같고 그림 같은 영화다.
앞선 리뷰가 지적한 것처럼 느린 영화에 박진감을 불어넣는 것은 배우들의 명연기다. 최민식은 주연임에도 불구하고 당초 예상보다 비중이 적었지만 삶 그 자체를 연기한다. 동물 호랑이와 인간 호랑이가 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리뷰 제목이었던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와 포수의 이야기는 흥행할 수 있을까’란 질문은 ‘대호’의 숙제를 새삼 확인시킨다. 맵고 짜고 단 음식에 길들여진 관객들 입맛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150억 가까이 퍼부은 영화의 현실적인 고민이다. 실제 ‘히말라야’의 감동,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스케일, ‘내부자들’의 흡입력에 밀리는 분위기다.
만약 ‘대호’를 반일 감정을 상징하는 소재로 삼았거나 쫓고 쫓기는 추격전 속에 담긴 반전의 연속, 감동 코드의 전진 배치 등으로 다뤘으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흥행에 탄력이 붙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 이렇게 느리,고 이다지도 철학적인, 영화 한 편이 나온 것은 무척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