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언제든 또… e스포츠에 드리운 ‘승부조작’의 그림자

[기획] 언제든 또… e스포츠에 드리운 ‘승부조작’의 그림자

기사승인 2016-01-06 06:00:55

[쿠키뉴스=이다니엘 기자] “승부조작에 가담한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은 나름 딱한 사연을 말합니다. 하지만 승부조작은 범죄이고,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연루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도록 더욱 강력한 처벌규정을 마련할 것입니다”

지난 달 프로게이머 소양 교육 현장에서 이재균 전 감독은 자못 엄중한 메시지를 청중들에게 전했다. 현재 그는 한국e스포츠협회 경기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웅진 스타즈, 아나키 레블즈 등에서 오랜 시간 감독생활을 한 그의 강의에는 게임단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가 묻어났다. 더구나 지난해 승부조작 사건의 축인 박외식은 과거 이 전 감독 밑에서 선수 및 코치생활을 한 이력이 있다. 그만큼 그의 메시지는 현실적이었다.

지난해 9월에 창원지방검찰청 특수부는 스타크래프트2 불법도박 및 승부조작 관련 혐의로 박외신, 최병헌 등 감독·선수·코치 출신 9명을 구속 기소했다. 이 사건에도 여지없이 ‘브로커’가 있었다. 후원을 빙자해 게임단에 접근한 전 프로게이머 성준모는 운영비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승부조작을 종용하고, 이후엔 승부조작 개입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성 사주로 무보수 승부조작을 강요했다. 폭력 조직이 개입한 사실이 드러난 이 사건은 e스포츠계에 큰 충격과 함께 제2의 흑암을 드리웠다.

e스포츠의 구조적 특성과 승부조작

승부조작의 핵심엔 ‘브로커’가 있다. 게이머가 자생적으로 불법도박을 찾아 실행에 옮기는 경우는 없다. 1, 2차로 연계되는 브로커 중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하는 허브라인에는 ‘형·동생’ 내지는 ‘선·후배’, ‘스승·제자’와 같은 특유의 관계성이 있다.

합숙생활을 하는 e스포츠의 특성상 소수 인원의 ‘감염’은 집단 전체로 퍼질 수 있다. 지난해 승부조작에 노출된 스타크래프트2 게임단 프라임은 결국 팀 해체라는 ‘방역 처분’을 받았다.

이 전 감독은 “승부조작을 한 선수들을 보면 대부분 친분이 두터운 주변인의 권유로 시작한다”면서, “이들의 정에 호소하는 말에 흔들릴 수 있지만,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모든 걸 잃게 된다”고 경고했다.

스타크래프트와 같이 1대1 대결로 치러지는 종목의 경우 승부조작에 더 쉽게 노출될 수 있다. 한 개인의 결심만으로도 조작이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다. 2010년에 발생한 승부조작 사건을 보더라도 원종서, 마재윤 등의 브로커가 팀과 상관없이 다수의 개인에게 접근해 불법도박을 종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블리자드 관계자도 “1대1 경기가 승부조작에 취약한 구조임을 인지하고 있고, 그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선수들이 대체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 대라는 점도 위험 항목으로 지적된다. 이들은 승부조작의 심각성을 세심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 범죄에 가담할 여지가 있다. 2010년 불법도박을 주도한 몇몇은 혐의가 밝혀진 이후에도 게임 스트리밍 방송을 통해 수익활동을 지속하는 등 반성과 기미를 보이지 않아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e스포츠가 ‘멘탈 스포츠’의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승부조작 예방책 마련도 이에 걸맞은 고려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소탕’ 힘들면 ‘예방’으로

한때 승부조작 근절 차원에서 스포츠토토에 e스포츠를 정식 포함시키자는 주장이 물망 위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높은 배당률과 제한 없는 배팅이 가능한 불법 스포츠도박이 횡행하는 한 축구, 야구와 마찬가지로 승부조작은 계속될 거라는 반론이 맞섰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불법도박을 근절하는 것이다. 한국e스포츠협회는 불법베팅 관련 전담반을 꾸려 대응에 나서는 한편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경찰청 사이버안전국 등 유관기관과 협조해 신고포상제를 시행, 상당수 불법도박 사이트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해외 유동IP를 이용하는 사이트 운영자의 실체 파악 및 체포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협회 측은 “신고 프로세스를 간소화하며 불법 스포츠도박 사이트 차단에 상당부분 성과가 있었지만, 우후죽순 생겨나는 사이트를 모두 적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연고로 승부조작은 ‘소탕’ 못지않게 ‘예방’에도 초점이 맞춰진다. 특별히 상당수 선수들이 어린 선수라는 점에서 불법 도박의 심각성을 고취시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방책은 다각적으로 강구되고 있다. 협회는 선수와 코치진 전원이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소양교육을 매년 실시하고, 강력한 책임을 담은 서약서 서명을 받고 있다. 아울러 매년 수시로 게임단을 방문해 관련 종사자들과 1대1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현직 종사자뿐 아니라 일반 팬들이 언제든 불법베팅 관련 내용을 익명으로 제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했다. ‘클린 e스포츠 센터’다. 온라인상의 활동이 활발한 팬들의 제보로 센터는 소기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이 전 감독은 “게임단 순회 과정에서 몇몇 선수들은 승부조작 관련 제의를 받았다고 털어놓으며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묻기도 했다”며, “직접 선수들을 만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승부조작이 중범죄임을 인지시키는 활동이 승부조작 예방에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대한체육회 준가맹 승인… 국민체육진흥법 근거해 ‘엄격 처벌’

한국e스포츠협회는 지난해 1월 대한체육회 준가맹 단체로 승인을 받았다. 이에 따라 e스포츠는 국민체육진흥법의 적용을 받는다. 공신력 있는 관련법이 생긴 셈인데, 승부조작을 한 경우 체육회 징계 규정에 따라 징역 7년 혹은 7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재판 과정에서 범죄수익은 전액 몰수당하고, 협회 및 스폰서 차원의 민사소송도 감수해야 한다.



승부조작자는 무관용 원칙에 따라 ‘게임에 관한 모든 걸’ 잃게 된다. 협회는 해당 선수나 코치에 대해 영구제명 조치를 취하고, 트위치, 아주부, 아프리카 등에 관련 내용을 통보해 스트리밍 활동에도 제약을 건다.

스타크래프트 종목사인 블리자드는 배틀넷 계정생성 규정에 명시된 대로 불법 행위자를 징계한다. 이에 따르면 승부조작자는 본인 명의의 배틀넷 계정이 ‘영구 정지’되며, 모든 블리자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없게 된다.

리그 오브 레전드 종목사인 라이엇게임즈 또한 승부조작을 감행한 해당 선수의 계정을 정지하고, 해외 게임단에 사건내용을 담은 소견서를 발송해 게이머로서의 활동을 원천 봉쇄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사례에서 찾는 해결책

‘승부조작’이란 키워드는 ‘스포츠’라는 몸이 안고 있는 고질병이다. 시기만 되면 사건이 발생하고 담당기관은 강력한 규제 안을 마련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하지만 그럼에도 근절되지 않는 찰거머리 같은 존재다.

그렇다고 ‘노(no)답’인 건 아니다.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고 합심하면 된다.

유럽 4대 축구리그로 유명한 독일의 분데스리가는 유럽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가 축구장을 찾을 만큼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승부조작 사건의 아픔이 있었다.

월드컵 개최를 1여년 앞둔 2005년, 한 불법도박 업체에 매수된 호이저 심판이 승부조작으로 24억원의 배당금을 챙긴 사실이 밝혀지며 독일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그러나 독일은 담당처와 당국의 유기적인 대처로 위기를 넘겼다. 독일축구협회와 의회는 해당 심판에게 손실보상금을 청구하는 한편, 축구장에 들어서는 이들의 경제상황과 신용정보를 사전에 확인하는 법적 제도를 마련했다.

또한 자체 예산을 마련해 현장중심의 감시기능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경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장면이나 판정에 대해 반드시 영상을 첨부하고, 이를 판독하는 감사 제도를 도입했다. 스포츠 도박에 대해선 전담 부서를 신설, 베팅 감시 시스템도 마련했다.



모든 경기의 순간순간이 증거로 남고, 이를 수시로 감시하기 때문에 승부조작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를 토대로 독일은 2014년 기준 1부 리그 평균 관중 수에서 2위 잉글랜드(3만4151명)를 제치고 1위(4만2500명)를 차지하며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를 일궈냈다.

불법베팅은 사회적 문제, 당국의 관심은?

불법베팅은 일부 스포츠종목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엄연히 사회적 문제이고, 문화와 의식의 문제다. 건전하지 못한 문화는 곧 그 사회의 수준을 나타낸다. 때문에 건전한 스포츠맨십은 사회의 역량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e스포츠 분야에 편성된 예산은 26억4200만원으로 지난해 대비 10억4200만원(65%) 상승했다. e스포츠 산업의 가능성을 고려한 증액 편성이라는 게 문체부의 설명이다.

그러나 항목별 면면을 살펴보면 대회 및 산업기반 조성 명목이 대부분이며, 선수 소양이나 윤리적 내실을 다지는 관리 프로그램 항목은 어디에도 없다. 이에 대해 문체부는 “기획재정부에 관련 예산을 신청했으나 반영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문체부에 따르면 2016년도 e스포츠 예산안 중 ‘e스포츠 산업 종사자 교육 프로그램 운영’ 항목으로 5억원을 기재부에 신청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이 사업 예산은 선수 교양교육, 은퇴 선수 재교육 지원 등을 목적으로 책정한 것으로, 승부조작 예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예산 퇴짜가 지난해 10월경 불거진 승부조작 사건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결과라고 해도, 2010년 승부조작 이력이 있는 스포츠 종목에 대한 예방 예산을 거부한 것은 다소간 납득하기 힘들다. 사건이 터진 뒤에야 급히 수습하는 ‘뒷북 행정’이야말로 사회의 질을 떨어뜨리는 ‘나쁜 행정’의 표본이다.

황금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 말길

승부조작, 불법베팅과 같은 문제는 어중간한 노력으로 근절할 수 없다. 보여주기식 행정으론 더욱 그렇다. 독일 축구의 사례를 보더라도 전 국민적 관심과 함께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심지어 사법권까지 동원돼 승부조작과의 ‘전쟁’을 벌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선수가 불법베팅에 가담하는 것은 대부분 처우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선수생활에 따른 불안정한 미래도 중요한 이유다. 선수들의 복지를 개선하고 보다 안정적인 미래를 계획하게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e스포츠계가 안고 있는 중요한 숙제다. 블리자드 한 관계자는 “선수들의 처우개선과 복지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불법베팅 근절의 가장 중요한 해결책이라 본다”며, “이에 대한 대안을 세심히 살피고 있다”고 전했다.



스트리밍을 통한 수익 창출은 훌륭한 대안으로 꼽힌다. 최근 아프리카, 다음팟, 트위치, 아주부 등의 스트리밍 플랫폼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고 있고, 중국, 유럽, 미국 등에서는 스트리밍 관련 거대한 투자가 포착된다. 실력만으로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는 한국 게이머들에게 있어서 스트리밍 수익 창출은 승부조작의 유혹을 이길만한 메가톤급 메리트가 있다.

한국 e스포츠는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성적만 놓고 봐도 그렇다. 이제는 좀 평준화가 됐나 싶었던 대회였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아니었다. 한국에서 총 세 팀이 출전했는데 두 팀이 결승전에서 만났다. 나머지 한 팀도 토너먼트에서 한국팀에게 떨어졌다. 우승을 차지한 팀의 유일한 1패는 한국 팀을 상대하다가 나왔다.

이 압도적인 기량 차이는 세계적인 충격이었고, 국내 팬들은 더욱 열광했다. 자본력만 보면 한국리그가 딱히 대단하지 않았다. 2014년, 최정상급 한국 선수들이 해외 팀으로 떠났다. 그럼에도 한국리그는 여전히 최강이었다.

WCS 스타크래프트2에선 16강 토너먼트에선 15명이 한국인으로 도배됐다. 유일하게 타국인으로 16강에 자리한 ‘Lilbow’는 여지없이 3대0 셧아웃 당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세계인들은 당연한 결과인 듯 놀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까? 수많은 해석들이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지만, 그 모두가 하나로 통한다. 바로 ‘오랜 e스포츠 역사 속에서 자리 잡은 체계’다. 이를 본받고, 벤치마킹하려는 시도는 이미 범국가적이다.

한국 e스포츠산업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불법베팅 근절에 온 힘과 정신을 쏟아야 하는 이유다. 적어도 황금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우를 범하진 말아야 하겠다.

daniel@kuk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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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니엘 기자
daniel@kukimedia.co.kr
이다니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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