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이혜리 기자] 68세 노인의 사랑이 이렇게 절절할 줄 누가 알았겠나. MBC 월화드라마 ‘화려한 유혹’에서 정진영은 시한부 삶을 사는 60대 남자 강석현으로 분해 최강희(은수)와 멜로 연기를 펼쳤다. 선이 굵은 연기를 주로 해온 탓에 그의 멜로 연기는 시청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에 오랜 연기 활동 중 어느 때 보다 많은 관심을 얻었고, 시청자들로부터 ‘할배 파탈’(할아버지+옴므파탈)이란 애칭까지 얻었다.
‘화려한 유혹’은 아직 방영 중이지만, 정진영은 극중에서 불꽃같은 삶을 살다 드라마를 먼저 떠났다. 그를 삼청동에서 만나 강석현으로 살았던 8개월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화려한 유혹’을 끝낸 소감을 물으니 정진영은 곧바로 “우울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드라마가 끝날 때쯤에 한 스태프가 ‘배역에서 빠져 나오려면 힘들겠다’고 하더라. 촬영 중에는 집중해서 찍고 끝나도 잘 빠져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인터뷰를 하다보니까 우울해졌다. 촬영할 때는 연기를 분석하고 감정에 집중해서 다른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았던 것 같다. 끝나고 나서 아쉬움도 아니고, 몇 개 월 간 가져왔던 감정을 되새겨보니 ‘나의 뇌가 고단했구나’ 인정하는 상태인 것 같다.”
정진영은 극중에서 돈과 권력을 쫓는 야망 넘치는 정치인 강석현을 연기했다. 그러나 시한부 판정을 받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여자 은수(최강희)를 만나 사랑한다. 은수는 딸의 친구로 자신보다 36살이나 어리다. 정진영은 이러한 파격적 설정을 시청자들에게 납득시켜야 했다. 자칫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랑이야기였지만 정진영은 시청자를 설득했고, 공감을 일으켰다.
“연기를 하면서 강석현의 감정을 느끼고 살았고, 실제로 불편한 감정을 울컥 느끼기도 했다. 나이 많은 남자가 어린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게 가능할까 걱정이 많았다. 배우는 해내야하지 않나. 어떻게 설득할까 고심을 했다. 처음에는 은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연민을 느꼈고, 나중엔 사랑으로 치닫게 된다. 나도 강석현에게 감정이입했고, 그러한 마음들이 시청자들에게 전달된 것 같다.”
정진영은 멜로 연기 경험이 거의 없다. 과거 KBS2 드라마 ‘사랑비’에서 이미숙과 회고적 멜로 연기를 펼쳤고, 영화 ‘비천무’에서는 김희선을 향한 외사랑을 했다. 그간 여성파트너조차 없이 남자배우들과 하는 작품을 주로 해왔다. 그는 “정진영에게 없던 모습을 보고 시청자들이 좋아해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시작 전 작가가 강석현 캐릭터는 굉장히 멋있을 거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그런 말을 잘 안 믿는다. 의도를 갖고 출발해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게 이야기지 않나. 어느 순간 달달한 멜로 장면도 나오더라. 예상을 전혀 못했고,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이건 강석현이 아닌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나의 연기 톤과 표정이 은수한테 이야기할 때 부드러워졌다. 그게 사랑이었고 변하는 걸 인정했다. 내가 느껴지는 감정대로 가다보니 감정이 진해졌다.”
강석현이란 캐릭터가 준 과제는 멜로가 전부는 아니었다. 극중 석현은 알츠하이머를 앓아 결국 운명한다. 정진영은 멜로 연기만큼이나 치매 연기가 쉽지 않았다고. 치매에 걸려 사랑을 고백하고, 저지른 악행에 대한 사죄도 하고, 이야기 전개를 위한 팁도 던져야했다.
“치매에 대한 경험도 없고, 내면을 관찰할 수 없지 않나.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 초반에는 버전을 여러 가지로 해서 찍어보고, 괜찮은 컷을 선택해 캐릭터를 만들어갔다. 치매 투병 중이라고 해서 마냥 아이 같은 톤으로 연기하고 싶진 않았다. 여러 가지 연기 방법을 연구해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고 최고의 상태를 찾아갔다. 또 감독이 미묘한 감정을 잘 찾아가 포착했다. ‘극강의 감정 승부사’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내가 감정을 잘 찾게 디렉션을 해줬다.”
최근 KBS2 ‘태양의 후예’의 송중기와 SBS ‘애인있어요’ 지진희 등이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바 있다. 정진영 역시 ‘화려한 유혹’으로 사랑을 받았으나 이러한 환호성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고. 그는 “송중기와 지진희를 이길 생각은 없다”며 웃었다.
“결과적으로 ‘화려한 유혹’을 통해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다. 그런데 그것만 파고들면 인생이 망할 거다. 다른 작품에선 다른 길로 가야한다. 한때의 즐거움과 환호가 계속 지속되리라 믿고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한다. 내가 해오던 배우 생활이 있다. 커다란 팬덤이나 환호성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게 나의 삶이다. 앞으로도 조용히 재미있게 연기를 하고 싶다.” hy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