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영화의 나라입니다. 수준 높은 영화를 만드는 거냐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관객 수 기준으로 봤을 때입니다. 연간 극장을 찾는 관람객 수는 2억 명에 달하고, 인구 1인당 영화 관람 횟수는 평균 4.22회(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2015년)입니다. 한국 관객들은 세계 박스오피스를 통틀어 까다롭고 수준 높기로도 유명하죠. 그래서일까요. 영화계로서는 전무후무한, 이른바 ‘번역가 보이콧’이 일어났습니다.
사건은 11일 오후 일어났습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세 번째 예고편이 공개된 날이기도 하죠. 문제가 된 것은 자막이었습니다. 예고편 속에 등장한 캐릭터 할리퀸(마고 로비)의 대사는 존댓말로 번역됐죠.
존댓말이 뭐가 문제일까 모르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DC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악당 캐릭터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세계를 지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할리퀸은 독보적인 사이코 캐릭터입니다. 할리퀸은 본래 평범한 정신과 의사였지만 자신이 있는 병동에 수감된 악당 조커에게 감화돼 조커 외에는 어떤 남자도 사랑하지 않는 악당 할리퀸으로 변신하게 되죠. 자연스레 다른 남자 캐릭터들에 대한 취급은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입니다. 평범한 남자들은 물론이고, 같은 악당(?)인 남자 캐릭터들에게도 거침없이 비아냥거리고, 욕하고,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는 인물이죠. 그런데 이런 할리퀸이 다른 남성들에게 존댓말을 쓰고, 심지어 “오빠”라고 부르는 자막이 공식 자막으로 상영된다면? 캐릭터 해석을 아예 망쳐버린 것도 모자라 아무 것도 모르는 한국 관객들에게 번역가 개인의 캐릭터관을 강요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죠. 결국 이튿날인 12일 오후에는 SNS상에 ‘#박지훈보이콧’이라는 해시태그까지 등장하며 보이콧 운동이 일어나기에 이르렀습니다.
단순 1개 영화의 오역이었다면 번역 수정을 요청하면 될 일이지만, 한국 관객들이 번역가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번역가 개인을 보이콧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박지훈 번역가는 그간 계속해서 오역으로 많은 논란을 빚어낸 바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3월 개봉된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개봉 당시 박지훈 번역가가 맡은 다수의 오역들로 인해 배급사인 워너브러더스 측이 번역 오류에 대한 해명과 진화에 나섰습니다.
4월 개봉한 ‘캡틴 아메리카 3 : 시빌 워’ 또한 박지훈 번역가의 작품인데요, 해당 작품에서는 오역보다는 ‘수어사이드 스쿼드’와 비슷한 맥락의 문제 제기가 이뤄졌습니다. 주인공인 캡틴 아메리카는 여성 캐릭터인 샤론 카터에게 영화 내내 존댓말을 썼지만, 샤론 카터와 키스한 이후에는 바로 말을 놓고 반말을 일삼습니다. 영어에는 존대와 반말 개념이 없기 때문에 이는 전적으로 번역가의 여성관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주류를 이뤘고, 이는 곧 ‘여성혐오(misogyny)’ 논란과 맞물려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외에도 과거 박지훈 번역가가 ‘007 스카이폴’에서도 ‘된장녀’라는 단어 사용으로 영화의 맥락을 해쳤던 부분도 다시금 드러났죠.
배급사 측은 이에 관해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않았지만, 관객들은 현재까지도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단순 번역가 보이콧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번역이라는 것은 번역가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 영화를 수입·배급하는 이들까지도 세심하게 검토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영화의 정서가 개봉 국가의 정서와 맞는지,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알맞게 관객에게 전달되는지 등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간 그러지 못했다는 지적입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의 한국 관객이지만 그 수준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영화사의 배급을 언제까지 수용해야 할까요. 영화사가 진정으로 흥행을 바란다면 심사숙고해야 할 부분들은 어떤 것인지 모두가 고민해 볼 일입니다.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