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심각하기만 했던 한국 재난영화에 웃음꽃이 피었다. 영화 ‘마션’의 멧 데이먼처럼 극한의 상황에서도 낙천적인 모습을 잃지 않는 하정우의 코믹 연기에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신선함에는 ‘한국 영화’라는 단서가 붙는다. ‘터널’은 할리우드 영화 ‘배리드’의 설정과 ‘마션’의 낙천성, 그리고 세월호를 경험한 한국 사회 등 관객들에게 익숙한 장면들을 버무린 안전한 상업영화에 가깝다.
‘터널’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붕괴 사고가 일어나 터널 한 가운데에 갇힌 자동차 딜러 이정수(하정우)의 이야기를 다룬다. 좁은 공간에 갇힌 그에겐 생수 2병과 딸에게 주려고 했던 생일 케이크, 그리고 배터리 78% 남은 핸드폰이 전부다.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무사히 살아나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정수가 지나칠 정도로 긍정적인 남자라는 사실이다.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그는 예의를 갖춰 바깥세상과 대화를 이어가며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쉽게 놓지 않는다. 또 정수는 긴 시간을 버티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아 관객들을 안심시킨다. 영화에 대한 찬사의 절반은 하정우의 몫이어야 한다.
반대로 바깥세상은 답답함의 연속이다. 생존자의 구조보다 특종이 우선인 언론, 부실공사를 저지른 시공업체, 구조보다 사진 찍기 바쁜 정부 인사들은 한숨이 나오게 한다. 무엇보다 사람의 생명이 아닌 구조 가능성과 사고 수습 타이밍을 재는 것에 급급한 모습은 2014년 세월호 사태를 경험한 지금 시대의 국민들에게는 익숙한 장면들이다.
영화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재난영화의 공식을 깨겠다’는 홍보 문구로 신선함을 예고한 ‘터널’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상의 메시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재난상황을 소재로 담담하게 늘어놓고 정리한다. 무력한 개인과 무능력한 정부가 쌓아올리는 이야기 구조는 안전하지만 식상하다.
‘터널’은 관객들이 기대를 안 하기가 더 어려운 영화다. 영화 ‘끝까지 간다’로 국내외 영화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었던 김성훈 감독과 믿고 보는 배우 하정우, 배두나, 오달수가 뭉쳤기 때문이다. 또 100억 원대의 제작비가 투자된 ‘터널’은 ‘부산행’,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과 함께 2016년 여름 영화 기대작으로 꼽혀왔다.
배우들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터널과 바깥세계의 넓은 간격을 메워준 건 배우들의 코믹, 감정 연기다. 특히 하정우는 평소 갖고 있던 유머러스한 이미지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자신의 역할에 그대로 적용시켜 영화 내내 신뢰감을 전해준다. 오는 10일 개봉. 12세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