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정진용 기자] 이화여자대학교 명예총장 제도에 대한 학내 구성원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허술한 명예총장 규정을 이용해 공금을 경조사비로 쓰고 장기간 학교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명예총장은 최초 여성 헌법학자인 윤후정(84) 10대 총장이다.
윤 전 총장은 20년째 명예총장직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6년의 총장 임기가 끝난 지난 1996년 9월 바로 명예총장직으로 옮겼다. 이사회에는 16년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윤 명예총장은 지난 2000년부터 11년 동안 이사장을 맡은 뒤, 2011년 이사로 직함을 바꿨다. 현재는 명예총장과 이사를 겸하고 있다.
지난 23일 윤 명예총장은 법인카드로 명품 가방을 산 부총장과 함께 공금 유용으로 적발됐다.
교육부의 회계 감사에서 이대 명예총장 및 사무국장이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할 경조사비 1200여 만원을 법인회계의 업무추진비에서 사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대 측은 “명예총장 명의로 이화의 교직원에게 보내는 경조사비에 한해 재단이 지원했으며 이는 '명예총장에 관한 예우규정'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명예총장은 기 지급됐던 경조사비를 재단에 전액 반환했다”고 덧붙였다.
◇ “교수, 학생에게는 허리띠 졸라매라더니”
회계 감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 교직원 사이에서는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 나왔다.
교수협의회 사이트 자유게시판에는 지난 23일 “평교수들은 연구비 카드 증빙 하나만 누락해도 큰일이 난 것처럼 난리를 치면서 명예총장은 학교 돈을 내 돈처럼 쓰는 게 말이 되나”, “명예총장직은 종신직인가. 윤 명예총장이 대학의 설립자나 오너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교직원 경조사에만 업무추진비를 지원했다는 학교 측의 해명이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한 교수는 “경조사에 총장 명의 대표 화환을 받았을 뿐, 주변 교수들도 경조사에 명예총장이 보낸 뭔가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며 “사사로운 외부 경조사에 공금을 쓴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윤 명예총장은 학내에서 ‘이화왕국의 상왕(上王)’, ‘대비마마’ 등으로 불릴 만큼 영향력이 막강하다”며 “특정 인물이 장악한 이사회가 비민주적인 의사결정의 배경이라고 보고 자체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예전부터 나왔다”고 털어놨다.
본관 점거 농성 중인 학생들도 지난 2일 “총장 사퇴가 이번 사태의 해결책”이라며 전 부총장 법인카드 유용을 비롯해 명예총장에 대한 예우, 유지비, 적립금 사용 내역 등에 의혹을 제기했다.
◇관련 조항은 “명예총장은 그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는다”
윤 명예총장이 20년 동안 자리를 독차지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바로 허술한 이대의 명예총장 규정 때문이다. ‘이대 명예총장 규정’은 윤 이사가 명예총장에 오른 다음 해인 1997년 2월에 제정됐다. 규정은 이후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았다.
재단은 명예총장에게 ‘느슨한’ 규정을 바탕으로 경비를 지원했다. 명예총장에게 지원하는 공금 관련 조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제4조1항 ‘명예총장은 그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는다’와 2항 ‘명예총장이 공무로 출장하는 경우에는 총장에 준하는 여비를 지급한다’는 것이다. ‘상응하는 예우’가 무엇인지에 대한 규정은 없다.
이대 명예총장은 총장직을 역임한 자로서 이화학당 이사회 승인과 이사장 추대를 통해 임명된다.
정해진 임기도 없다. 한 번 명예총장을 맡은 사람은 본인이 물러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직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타 대학은 이대보다 비교적 자세히 명예총장에게 지원되는 공금 내역을 정해 놓았다. 덕성여자대학교나 세종대학교의 경우 ‘총장의 보수액 한도 내에서 수당으로 지급할 수 있다’, ‘필요에 따라 급여, 연구비 또는 각종 수당 등을 지급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전과학기술대학교는 ‘명예총장에게는 보수를 지급하지 아니한다. 단, 특강을 실시하거나 또는 특정 업무 등을 위탁할 경우 수당, 여비, 교통비 등 적절한 실비변상적인 경비를 지급할 수 있다’ 고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명예총장의 임기를 명시한 대학도 있다. 명지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세종대학교는 중임할 수 있긴 하지만 2년, 4년 이내 등으로 기간을 정했다. 세종대학교는 ‘명예총장이 그 명예를 손상할만한 행위를 하였거나 또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는 명예총장의 추대를 취소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도 마련해놨다.
◇ 설립 이래 종합 감사 無…교육부 “심각한 문제 있는 대학만”
이대에서는 교육부의 ‘미래라이프’ 사업을 둘러싸고 학생과 학교 간에 갈등이 장기화 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와대 ‘비선 실세’로 지목받는 최순실씨 딸이 특혜 입학했다는 의혹 등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그러나 관리감독의 의무가 있는 교육부는 역할에 소홀한 모양새다.
지난해 9월 국정감사에서 정진후 정의당 전 의원은 ‘이대는 설립 이래 교육부의 종합 감사를 단 한 번도 받지 않은 4년제 사립대학 중 하나’라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 23일 교육부가 발표한 결과도 회계 부분 감사일뿐이다. 교직원 인사, 입시, 학사, 법인 운영 등 학교 운영 전반에 대해 실시하는 종합 감사는 한 번도 없었다.
교육부 사학감사 담당관은 종합 감사가 없었던 데 대해 “특정 대학을 일부러 감사 대상에서 빼주는 그런 체계는 절대 아니다”며 “시간과 인력의 문제가 크다”고 해명했다.
이어 “종합감사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대학이 우선시된다”며 “이대도 특정 사안이 생기면 감사를 받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사학운동본부 “경조사비는 개인 업무…전액 환수로 끝날 일 아니야”
한 이대 관계자는 업무추진비 논란에 대해 “재단이 윤 명예총장에게 지원한 것은 교내 구성원의 경조사비뿐”이라며 “다만 자문회의 참석 시에는 차량이 제공됐다”고 말했다.
이어 “총장 임기가 끝날 무렵 교수들이 재단에 찾아와 명예총장으로 추대를 제청했다”며 “명예총장은 명예직이기에 임기는 없다”고 밝혔다.
사학개혁운동본부 정대화 공동대표는 “‘명예’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직책은 사실 정해진 법이나 규칙이 없다”면서도 “이대의 명예총장 규정은 모호한 예우 조항을 비롯해 특정 인물의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시키는 부적절한 제도로 보일 소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명예총장에 대한 예우는 그 본인에만 한정돼야 한다”며 “경조사비는 분명 단체 업무가 아닌 개인적 업무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또 정 대표는 “법에 저촉될 소지가 있으므로 단순히 전액 반환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라며 “교육부는 적절한 행정지도를 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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