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취인불명]은 최근 화제가 된 사안과 관련, 가상의 화자를 설정해 작성한 편지 형식의 기사입니다.
[쿠키뉴스=정진용 기자] 외교부가 “부산뿐 아니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도 옮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23일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외교공관 앞에 조형물이 설치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이전 요구에 대해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고 기념사업을 시행하자는 취지에 전혀 이견이 없지만 외교공관 보호와 관련된 국제예양 및 관행을 충분히 반영해달라는 취지”라고 해명했습니다.
부산 동구 일본 총영사관 인근에 소녀상이 설치된 이후 한일 양국은 냉전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방적으로 일본에 끌려가는 모양새입니다. 지난달 9일 일본 정부는 소녀상 설치에 항의하며 주한 일본 대사와 부산 총영사를 일시 귀국 조치했습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소녀상이 철거될 때까지 대사를 돌려보내지 않겠다”면서 고자세를 유지하는 반면 한국 외교부는 쩔쩔매고 있습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외교부는 아베 정권의 한국 출장소”라고 맹비난했습니다.
갑자기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상황에 답답한 분들이 많을 겁니다. 삼일절을 맞아 소녀상이 보내는 편지를 읽어 보실까요.
국민 여러분께
이쯤 되면 갈 데까지 가자는 거죠. 좀 격하게 말해도 될까요. 외교부인지 왜(倭)교부인지 모를 분들이 저더러 방을 빼라고 하네요.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그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제 소개를 빼먹었군요. 저는 ‘평화의 소녀상’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를 위해 25년 동안 매주 열린 수요집회가 1000회를 맞은 지난 2011년 12월14일 세워졌습니다. 되돌아보면 이곳에 자리 잡은 이후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전국에 있는 제 친구 60여 명을 대변해 국민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지난해 12월28일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 있었던 떠들썩했던 사건, 다들 아실겁니다. 위치가 위치인만큼 제 친구가 들어서기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어요. 부산 동구청 직원 60여 명과 경찰은 제 친구를 지키려는 청년들을 무자비하게 끌어냈습니다. 단지 도로법 제72조(도로에 관한 금지행위) 시행령에 어긋난다는 이유 만으로요. 13명이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경찰에 연행됐습니다. 이 친구는 야적장에 방치된 고물 처지가 될 뻔했지만, 시민의 항의가 빗발친 덕분에 총영사관 후문 옆에 앉아 있게 됐습니다.
화도 나지만 동시에 서러움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원망스러운 대상은 우리 정부입니다. 일본 눈치만 보면서 힘없는 지자체를 압박하고 있잖아요. 외교부는 처음에 “민간에서 추진한 사안으로 정부에서 관여할 사안이 아니”라며 ‘나 몰라라’ 했었거든요. 근데 나중에 태도를 싹 바꿔서 지자체에 세 번이나 철거하라는 공문을 보냈답니다.
피해자 할머니들 얘기를 해볼까요. 지난 2015년 12월28일 한일위안부협정(한일협정)이 모든 사달의 시작이었습니다. 정부가 당사자도 모르게 체결한 ‘깜깜이’ 한일협정에 할머니들을 향한 진심어린 사과는 없었습니다. 이뿐인가요. 협정문에는 일본의 법적 책임이 명시돼있지 않았고, 일본이 내놓은 10억 엔은 배상금이 아닌 거출금이었습니다. ‘불가역적’ ‘최종적’이라는 표현도 포함됐죠. 일본에서조차 “너무 많이 이겼다”라는 평이 나왔다고 합니다. “사전협의조차 없었다”는 할머니들의 항의에 외교부는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전날 일본이 갑자기 움직이고, 연휴가 사흘이나 됐다”며 듣는 사람 뒷목 잡을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역대 어느 정부도 하지 못했다”는 정부의 자화자찬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습니다. 네, 정말 역대 어느 정부도 하지 않았던 일을 하긴 했습니다.
이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화해·치유재단은 할머니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지난 25일 김태현 재단 이사장이 할머니들에게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해주지도 않아요” “받을 건 다 받아야죠”라며 1억 원 수령을 강요한 녹취록이 공개됐습니다. 또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는 민간단체에 대한 보조금을 중단하고 있습니다. ‘외교계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소문이 무성해요.
제 생각에는 일본이 한국에게 소녀상 철거를 전제조건으로 10억 엔을 던져준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가해자가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나요. 한국 정부는 아니라고 펄쩍 뛰지만, 법원도 공개하라고 판결 내린 한일협정문을 끝끝내 보여주지 않잖아요.
그렇지만 전 희망을 잃지 않고 맞서 싸울 거에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한결같이 저를 지켜주려 노숙농성 하는 대학생들이 있거든요. ‘지킴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응원하는 시민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할머니들을 기억하려는 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 이달에만 ‘눈길’ ‘어폴로지’ 영화 두 편이 개봉할 예정이니 눈여겨 봐주세요.
오늘은 삼일절입니다. 2년만 더 지나면 삼일절 100주년이에요. 시간이 빠르게 가는 동안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남은 생존자는 39명입니다. 오늘로 수요집회는 1272회를 맞이했습니다. 제가 맨발에 발뒤꿈치를 들고 있는 이유는 그 아픈 세월을 견디고도 편히 쉬지 못하는 할머니들의 고된 삶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제 두 발이 온전히 땅을 디딜 수 있는 그 날은 아직 먼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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