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정진용 기자]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
지난 1995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했던 말입니다. 이 회장은 해당 발언으로 정권의 미움을 사기도 했죠. 22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회장의 발언은 무색하지 않은 듯합니다.
대선후보와 캠프 측의 구태로 ‘장미 대선’은 진흙탕이 되고 있습니다. 네거티브 공세는 구태 정치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바른정당과 자유한국당 사이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격한 언사가 오가고 있습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는 바른정당을 향해 “대선에서 지면 바른정당은 증발할 것” “바른정당은 (자유한국당에서) 떨어져 나간 서자 정당”이라고 막말을 했습니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 측은 홍 후보를 향해 “형사 피고인 홍 후보는 당장 후보직을 사퇴하고 학교에 가기 바란다”면서 “막말 홍 후보에게 국어 공부가 필요해 보인다”고 일갈했죠. 또 홍 후보는 지난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야들아 내가 너희들의 롤 모델이다’라며 젊은 유권자들을 겨냥한 글을 남겼습니다. 이에 유 후보 측은 “대한민국 롤 모델이 다 얼어 죽었나. 꼰대 준표를 롤 모델로 삼게”라고 날을 세웠습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쪽도 만만치 않습니다. 두 후보는 3D 프린터의 발음을 놓고 설전을 벌였습니다. 안 후보는 지난 7일 관훈토론회에 참석, 문 후보가 3을 ‘쓰리(three)’가 아닌 ‘삼’으로 읽은 것에 대해 “용어에 대해 전문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발음이 있다. 일반적으로 누구나 ‘쓰리디 프린터’라고 읽는다”고 우회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이에 문 후보는 자신의 SNS에 “우리가 무슨 홍길동입니까. ‘3’을 ‘삼’이라고 읽지 못하고 ‘쓰리’라고 읽어야 합니까”라는 짧은 글을 올려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죠.
심지어 ‘아침회의를 문재인 때리기로 시작한다’는 뜻의 ‘문모닝’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5일 논평을 통해 “줄곧 ‘문모닝’만 해온 국민의당이 국정 운영을 준비할 시간이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비꼬았는데요. 국민의당은 한발 더 나아가 “국민의당의 ‘문모닝’이 아프긴 아픈가 보다”라며 “굳모닝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면 ‘문모닝’이 아니라 ‘문올데이’라도 하겠다"고 받아쳤습니다.
대선 후보들이 상대 후보 비방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유례없이 짧은 19대 대선 기간에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대선 후보 선출 후 선거일까지는 5~6개월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이번은 다릅니다.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탄핵당하면서 정치권은 숨 가쁜 레이스를 하고 있습니다. 각 당은 부랴부랴 지난달 말과 이번 달 초 후보를 선출했습니다. 대선은 내달 9일에 치러집니다. 채 한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러다 보니 정책과 공약으로 대결하기 보다는 빠른 효과를 불러오는 ‘네거티브’에 기대는 것이겠죠. 각종 의혹을 던져도 검증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점도 네거티브 공세가 난무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네거티브 공세가 넘쳐나는 선거판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입니다. 후보들이 정작 집중해야 할 공약 경쟁에 소홀하기 때문입니다. 공약은 유권자의 중요한 판단 기준 중 하나입니다. 일례로 유권자는 후보들이 제시하는 ‘미세먼지 해결 방안’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최종 공약집을 내놓은 캠프는 단 한 곳도 없습니다. 또 후보들이 정책개발에 투자한 비용은 19대 국회 지출 평균인 1.6%에도 못 미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촛불집회 이후 시민의식은 한층 더 성숙해졌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이 국가와 헌법, 민주주의 가치가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줬다"고 평가하고 촛불집회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겠다고 밝혔죠. 반면 정치권은 어떨까요. 대선후보들은 입으로만 '적폐청산'을 외치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시민이 5달 넘게 추위에 떨면서도 촛불을 든 이유가 고작 ‘쓰리디’ 발음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대선 후보들의 구태를 보기 위해서는 아닐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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