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정진용 기자] 문재인 대한민국 제 19대 대통령의 임기가 10일 시작됐다. 문 대통령은 과거 "나는 정치와 맞지 않는다"며 정치 입문 권유를 한사코 거절하던 이였다. 18대 대선에서 패한 뒤에는 "권력 의지가 없다"는 평까지 나왔었다. 그랬던 그가 결국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을까. 문 대통령 인생의 '전환점'을 정리했다.
▲노무현과의 만남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했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문재인 '문재인의 운명')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만남은 문 대통령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문 대통령은 경희대 법대 재학 시절 민주화 운동으로 고초를 겪었다. 사법시험을 불과 1년 정도 준비한 후 유치장에서 합격 소식을 들은 문 대통령은 사법연수원을 2등으로 수료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 경력으로 판사 임용에 탈락했다. 그는 대형로펌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어머니가 계신 부산행을 택했다. 그곳에서 고 노 전 대통령과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됐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변호사 노무현 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고 부산의 대표적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부산지역 총괄 상임집행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 다음 해 고 노 전 대통령이 부산 동구에서 초선으로 당선되며 정치에 발을 들였으나 문 대통령은 변호사로 남았다. 그러다 그는 지난 2002년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고 노 전 대통령의 부산선대위 본부장을 맡으며 정계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고 노 전 대통령의 당선 이후에는 문 대통령이 수차례 변호사 복귀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나를 대통령 만들었으니 책임지라"는 고 노 전 대통령의 말에 청와대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 등 요직을 차례로 맡았다.
▲30년 지기의 사망
"사실 옛날의 저는 정치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었다. 그러나 노무현, 김대중 두 분 대통령의 연이은 서거가 제 운명을 바꿨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지난달 30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로터리 유세에서)
많은 문 대통령 지지자들은 마음을 굳힌 결정적 계기로 지난 2009년 5월29일 고 노 전 대통령 영결식을 꼽는다. 문 대통령은 영결식에 참석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당시 백원우 전 의원은 이 전 대통령을 향해 "여기가 어디라고... 사죄하시오"라며 큰소리로 항의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이 전 대통령에게 상주로서 사과했다. 30년 동지를 잃은 아픔 속에서도 절제력과 의연함을 보여준 그의 모습은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고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문 대통령을 정치인의 길로 다시 이끌었다. 이후 지난 2011년 출판한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은 1년 만에 23만 부, 합계 약 30만 부가 팔렸다. 자서전 출판은 문 대통령의 두꺼운 '팬층' 형성에 기여했고 이는 곧 그의 정치적 자산으로 이어졌다. 문 대통령은 이 기세를 몰아 지난 2012년 19대 총선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 3당 합당 이후 사상구에서 당선된 첫 번째 민주당 후보가 됐다.
▲박근혜에게 패배하다
"'노무현 대 박정희' 프레임은 선거를 과거에 묶어버렸다. 노무현을 넘어서는 것이, 노무현을 이기는 것이 그의 마지막 부탁이라는 것을 안다. 꼭 그렇게 하겠다"(문재인 '1219 끝이 시작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12년 18대 대선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선거일을 한 달 앞두고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와 단일화를 단행했고 48.02%라는 역대 야권 대선후보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산을 넘는 데는 실패했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던 그는 지난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를 맡으며 정치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당이 선거에서 연달아 패배하며 리더십 위기에 봉착했다. 10.28 재보궐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계파 갈등은 더욱 퍼졌고 같은 해 12월 안철수 당시 공동대표가 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수난은 계속됐다. '민주당 텃밭' 호남 지역에서도 반문(反文)정서가 확산되자 문 대통령은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의 '경제 멘토' 김종인 전 의원을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했고, 당대표에서 물러났다. 문 대통령의 절박함이 통한 것일까. 결국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4월13일 치러진 20대 총선에서 123석을 차지하며 원내 1당을 차지했다.
▲국정농단, 문재인을 대세로 만들다
"속속 밝혀지는 최순실 게이트의 실상은 차마 부끄럽고 참담해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수준입니다. 이건 단순한 권력형 비리가 아닙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더 이상 숨지 말고 직접 국민 앞에 나서야 합니다"(2016년 10월24일 JTBC '최순실 태블릿 PC' 보도 당일 문 대통령이 발표한 특별성명)
지난해 10월 불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문 대통령을 대세론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지난 2015년 하반기까지만 해도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달렸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대항마였던 반 전 사무총장은 국정농단 사태와 귀국 뒤 부적절한 언행이 겹치며 중도 하차했다. 이후 문 대통령은 대선 전까지 여론조사에서 굳건하게 선두를 지켰다. 문 대통령은 CBS 의뢰로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3일 발표한 5월1주차 주중 집계(1~2일)에서 지지율 42.4%를 기록, 18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한때 문 대통령과 안 후보의 지지율 격차는 3%p 차이로 좁혀졌으나, 대선 전 마지막 조사에서 문 대통령은 안 후보를 20%p 차이로 여유 있게 앞섰다. (그 밖의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문 대통령은 지난해 겨울 촛불집회에 꾸준히 참석하며 광화문광장을 지켰다. 또 지난해 11월 최씨의 구속, 지난 3월 현직 대통령 탄핵·구속이 잇따르며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그의 발언과 행동에 온 국민의 이목이 쏠렸다. 물론 대선으로 가는 길이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문 대통령은 선거기간 내내 아들 준용씨의 취업 특혜 의혹, 대북·안보관으로 상대 후보들의 공격에 시달렸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결국 '촛불정국'을 발판 삼아 '장미대선' 최후의 승자로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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