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영업남] ‘김생민의 영수증’에만 있는 것

[고독한 영업남] ‘김생민의 영수증’에만 있는 것

‘김생민의 영수증’에만 있는 것

기사승인 2017-09-07 17:44:17


KBS2 ‘김생민의 영수증’을 처음 본 순간, ‘이게 대체 무슨 프로그램이지?’ 하는 물음표가 머리를 스쳤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방송이었다.

‘김생민의 영수증’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팟캐스트 ‘송은이&김숙 비밀보장’의 한 코너로 시작해 1시간 분량의 단독 팟캐스트를 거쳐 공중파까지 진출할 만큼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찾아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집안일을 하면서 곁 눈길로 보기 시작했다가 어느새 지금까지 나온 방송을 모두 몰아보기 시작했다. 한 회당 고작 15분 분량이라 3회를 모두 보는 데에도 4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모두 보고난 후에는 애청자들이 프로그램을 1시간 분량으로 늘려달라고 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다.

‘김생민의 영수증’에 등장하는 출연진과 스튜디오는 간소하다. 온통 흰색으로 된 스튜디오 왼쪽에 자리한 방송인 송은이, 김숙은 필기하듯 김생민의 말을 받아 적으며 멘트를 날리고, 오른편에 김생민은 의뢰인의 영수증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분석하며 계산기를 두드린다. 마치 재무설계 전문가의 컨설팅을 귀 기울여 듣는 분위기였다.

방송은 긴장과 웃음이 빠른 템포로 교차한다. 영수증을 분석하고 조언하는 과정에서 김생민이 ‘그레잇(Great)’과 ‘스튜핏(Stupid)’ 중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하다가 의외의 지적, 혹은 의외의 칭찬이 나오면 그 이유를 듣고 웃음을 터뜨리는 식이다.

단순하게 두 가지 분류로만 평가하는 건 아니다. 김생민은 사연의 흐름과 상황에 맞춰 부모님에게 선물을 사드린 소비는 ‘효도 그레잇’이라고 추켜올리고, 어머님의 잘못된 소비에 대해서는 ‘공손하게 두 손 스튜핏’이라며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그 패턴이 워낙 다양해 쉽게 예측되지 않는다.

독특한 점은 영수증만으로 의뢰인의 캐릭터를 구현하는 대목이었다. 대강의 나이와 성별, 직업, 월수입만 등장할 뿐 의뢰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는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1~2달 동안 사용한 영수증만 들여다봐도 그의 생활 패턴은 물론 심경 변화까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영수증만으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공백이 있긴 하지만, 의뢰인이 어느 시점에 어떤 결심을 했고 언제 스트레스를 받아서 왜 그런 쇼핑을 하게 됐는지 대강은 알 수 있다. 김생민이 자신의 상상을 덧붙인 연기로 의뢰인의 마음을 대신 표현해주기도 한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의뢰인의 인간적인 모습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저축하지 않는 내 모습을 반성하게 되기도 한다. 그만큼 영수증 한 장으로 시청자와 같은 눈높이에서 공감을 유도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이다.

김생민을 활용하는 방식 또한 ‘김생민의 영수증’만의 특징이다. 지난 1992년 KBS 특채 개그맨으로 데뷔한 김생민은 코미디로 잘 풀리지 않아 리포터로 오랜 기간 활동해왔다. 덕분에 대다수의 시청자들에겐 그동안 다른 연예인과 영화 등을 더 빛날 수 있게 조명하는 김생민의 모습이 더 익숙하다. 하지만 ‘김생민의 영수증’에서는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대활약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덕분에 김생민은 새로 태어난 것처럼 다른 이미지를 획득하게 됐다. 이미지 변신에는 마치 원래부터 김생민이 그랬다는 듯 옆에서 능청스럽게 리액션해주는 송은이, 김숙의 공이 크다. 그가 25년 만에 제1의 전성기를 맞게 된 원인을 송은이, 김숙에게 돌리는 건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김구라가 지난달 30일 방송된 MBC ‘라디오스타’에 게스트로 출연한 김생민을 조롱했다는 논란에 시달린 건 김생민이 연예계 대표 짠돌이에서 대국민 재무컨설턴트로 변신한 큰 폭의 이미지 변화를 감지하기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평소 게스트를 대하는 태도를 곱지 않게 바라보던 시청자들이 김생민을 통해 불만을 분출하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김생민의 영수증’을 시청한 이후 물건을 사기 전에, 택시를 타기 전에 정말 필요한 소비인지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적금을 하나 더 들어야 할까 하는 고민도 생겼다. 아마 팟캐스트와 방송으로 김생민의 지적에 공감하고 웃음을 터뜨린 많은 시청자, 청취자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고 싶은 절실함이 있거나, 별 생각 없이 돈을 쓰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이들에게 ‘김생민의 영수증’을 시청하길 권한다.

★ [고독한 영업남] : ‘이건 반드시 사야 돼’ 싶은 신상 구두를 발견한 순간처럼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훅 빠져든 바로 그 순간, 이 좋은 걸 나 혼자 간직하는 건 인류의 낭비라는 죄책감이 들어 글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진지한 궁서체로 영업하고 싶다는 사적 욕망을 본격 실현하는 쿠키뉴스의 코너.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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