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포착] 일제 징용 피해자들

[키워드포착] 일제 징용 피해자들

기사승인 2017-12-19 17:57:17


김민희 아나운서 ▶ 키워드 포착. 스튜디오에 심유철 기자 나와 있습니다. 심유철 기자, 안녕하세요.

심유철 기자 ▷ 네. 안녕하세요. 키워드 포착의 심유철 기자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네. 키워드 포착은 지난 시간부터 특별한 주제로 함께 하고 있는데요. 일본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한 내용으로 먼저 우키시마 호 참사에 대한 이야기 나눠봤어요.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역사인 만큼, 지난 내용 복습 한 번 할게요. 심유철 기자, 내용 간략히 정리해주세요.

심유철 기자 ▷ 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오던 8000명의 조선인 중 7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바로 우키시마 호 참사입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이 고의적으로 배를 폭발시킨 것으로 보이는데요. 하지만 그 후 일본 정부는 조사도,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 정부 역시 광복 후 벌어진 사건이라는 이유로 대처에 미흡했고요.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중인 건 소수의 생존자와 피해자 유족들인 만큼, 우리의 관심이 무엇보다 필요한 상황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네. 우키시마 호 참사.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사건인데요. 일본의 강제 동원으로 인한 사실에는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을 거예요. 심유철 기자, 오늘 제시할 키워드는 무엇인가요?

심유철 기자 ▷ 오늘 제가 제시할 키워드는, 징용 피해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네. 이상하게도 일제 징용은 피해자만 있을 뿐, 가해자가 없어요. 그래서 오랜 시간, 해결이 되지 않고 있는데요. 어떤 피해 사례가 있는지, 또 사과와 보상 문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오늘 심유철 기자와 함께 자세한 내용 알아봅니다. 심유철 기자, 당시 일본에 의해 징용된 사람들은 얼마나 되나요?

심유철 기자 ▷ 일본 정부가 공개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강제 징용된 사람들은 782만 7355명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당시 한국인 전체 인구는 2630만여 명이니, 약 30%가 징용 대상이었던 셈인데요. 그마저도 위안부 피해자들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이고, 또 일본 정부가 통계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동원 인원을 축소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일본의 발표만 봐도, 전 국민의 30%에 이르는 인원을 강제로 데려가 일을 시킨 건데요. 그마저도 축소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끌려간 건지, 가늠조차 어려운 상황인거죠. 그럼 그 구체적인 징용 피해 살펴볼게요. 먼저, 최근 영화로 주목받기도 했던 탄광에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죠?

심유철 기자 ▷ 네. 지난 1930년대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의 탄광 지역으로 강제 동원됐습니다. 하시마는 우리에게 군함도로 잘 알려진 곳인데요.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 항 근처에 위치한 섬으로, 19세기 후반부터 석탄 채굴을 위해 개발됐고요. 이곳 징용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강제 노동에 시달렸고, 가스 폭발 사고 등에도 채굴 작업을 계속해 지옥섬 또는 감옥섬으로 불리기도 한 곳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진 후, 내용이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요. 영화를 두고 논란이 있긴 했지만, 분명한 건 하시마에 강제 징용된 사람들은 그 곳에서 너무나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점이에요. 

심유철 기자 ▷ 그렇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징용 피해자들은 콩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인 콩깻묵 찐 것을 밥 대신 먹었고, 쉬는 시간도 보장받지 못한 채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을 했다고 하는데요. 결국 가혹한 노동으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속출한 곳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 곳에서 눈을 감은 건가요?

심유철 기자 ▷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하시마 탄광에 끌려간 600명의 조선인 중 122명이 사망했고요. 설령 살아남았다 해도,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은 극소수입니다. 일제의 군함도 강제 징용 피해자 중 현재 생존자는 6명 뿐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강조하지만, 이렇게 생존자들이 자꾸만 줄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급해져요. 생존자들이 남아 있을 때, 사과와 보상 문제 진행이 빨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강제 징용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는 곳에 기획취재팀이 방문했다고요. 그 내용도 전해주세요. 

심유철 기자 ▷ 네. 기획취재팀이 일본의 교토 시 우쿄구 게이호쿠초에 위치한 단바기념관에 다녀왔는데요. 그 곳은 조선인 수만 명이 착취당했던 탄광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으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한 맺힌 증언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곳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우리나라도 아닌 일본 내에서 일본의 강제 동원 역사를 기록한 곳이라.. 아무래도 운영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개인이 운영하고 있는 곳인가요?

심유철 기자 ▷ 네. 재일동포 2세 고 이정호 전 관장이 사재를 털어 건립했고요. 현재는 셋째 아들 이용식 관장이 운영하고 있지만, 지원이 없어 사정이 어려운 상태입니다. 단바기념관이 받은 우리 정부 지원금은 이명박 정부 당시 포상금 500만원이 전부로, 그것도 개인이 받은 것이고요. 이 외에 한국 정부가 단바기념관에 손을 내민 적은 없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념관 사업을 이어간 건,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네. 그렇게 역사를 기록하는 곳이 많아져야 하고, 또 제대로 된 지원이 이루어져야 이어갈 수 있을 텐데요. 이번 취재가 널리 알려지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어 다시 강제 동원 피해 사례 살펴볼게요. 군함도 뿐 아니라 다른 탄광에도 많은 사람들이 징용 되었는데요. 어떻게 가게 된 건지, 또 그 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생존자들의 이야기 들어볼게요. 

심유철 기자 ▷ 네. 단바기념관을 건립한 고 이정호 전 관장이 찾은 강제 동원 피해자인데요. 22살 때인 1943년 일본으로 가게 된 김갑선 씨의 증언에 따르면, 사람을 모집한다며 마을에 일본 사람들이 잔뜩 왔고요. 자신은 갓 태어난 딸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가기 싫었지만, 헌병이 가족을 고문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이제 갓 아기 아빠가 된 20대 청년이 협박으로 인해 일본에 가게 된 건데요. 일본 도착 후,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었나요?

심유철 기자 ▷ 그는 교토 부 가메오카 시에 위치한 오타니 광산에 끌려와 텅스텐을 채굴했는데요. 작은 트럭 한 대 무게와 맞먹는 1톤 광차를 미는 중노동에 시달렸지만, 그 곳에서 주는 밥은 보리밥 한 공기가 다였고, 견디다 못해 결국 광산에서 도망쳤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일본에 살게 되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결국 가족이 기다리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네요.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 증언도 있나요?

심유철 기자 ▷ 네. 또 다른 증언자 정갑천 씨 역시 아소그룹 산하 아카사카 탄광에 모집을 가장해 끌려갔고요. 지하 1000m 에서 석회를 캐내는 노동에 동원됐는데요. 낙반 사고와 가스 폭발사고가 자주 있는 곳이어서, 조선 사람들이 한 번에 열 명이나 사망해도 땅에 그냥 묻었다고 합니다. 임금은 부모님께 송금했다고 들었지만 나중에 확인해보니 돈을 부치지도 않았고, 해방된 뒤에도 일본에 머물러야 했던 이유는 단 하나, 고향에 돌아갈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지하 천 미터에서 고된 일에 시달렸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마저 벌지 못한 건데요. 그렇게 끌려간 곳은 탄광뿐만이 아니에요. 다른 곳으로 끌려간 징용 피해자들도 많은데요. 또 어떤 사례가 있는지 살펴볼게요. 이번에 기획취재팀이 직접 만난 피해자가 있다고요?

심유철 기자 ▷ 네. 이번에 일제 강제 동원에 대한 취재를 하던 중, 강제 동원 피해자 이상주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요. 사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게 사실일까 할 정도로 극한 상황들이 많았고요. 죄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이제라도 증언을 듣고,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겠죠. 이야기 좀 더 들어볼게요. 이상주 씨는 언제, 어떻게 끌려가게 된 건가요?

심유철 기자 ▷ 1940년. 당시 17세였던 그는 가지 않으면 네 형이라도 붙잡아 가겠다는 노무 담당관의 위협에 일본으로 끌려갔고요. 일본 이와테 현 가마이시에 위치한 가마이시 제철소에서 철을 만드는 일을 하고 광산에 가서 광석 채굴을 하는 등, 고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17살의 소년이 하기는 너무나 가혹한 일인 것 같은데요. 얼마동안 거기서 일을 했나요?

심유철 기자 ▷ 제철소에서 2년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지만, 바로 영장을 받고 징집되어 중국으로 끌려가 일본군을 대신해 싸워야 했습니다. 그가 당시 일본과 중국군보다 더 무서웠다고 밝힌 건 다름 아닌 굶주림이었는데요. 하루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개밥을 훔쳐 먹다가 일본인 상관에게 들켜 삽으로 맞았고, 그 후유증으로 그는 지금도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당시에는 10대였던 소년이 지금은 90대 노인이 되었지만, 강제 동원에 대해 사과나 보상은 받지 못한 상태인가요?

심유철 기자 ▷ 네. 제철소에 끌려가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전쟁에 참여해 죽을 고비를 넘긴 그에게, 일본도 우리나라도 사과나 보상은 없었습니다. 억울하다고, 대한민국에 속았다고 말하는 그의 앞에서 저희 기자들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네. 94세인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하루 빨리 진정어린 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할 텐데요. 일제 강제 동원 피해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진 사례도 있지만, 잊혀진 강제 동원 피해자들도 있다고요.

심유철 기자 ▷ 네. 잊혀진 강제 동원 피해자들도 있습니다. 정부가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를 1938년 4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차출된 이들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국민총동원령이 나오기 전의 강제 동원 피해자들은 인정조차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전에 알아본 우키시마 호 참사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요. 한일협정 후 피해자들에게 일부 보상금을 지급했지만, 광복 후 벌어진 참사이기 때문에, 보상 범위에 해당되지 않아 보상금 지급을 하지 않았는데요. 또 어떤 경우가 있나요?

심유철 기자 ▷ 고베전철 공사에 동원된 피해자들입니다. 지난 20~30년대 고베 시내와 일본 3대 온천인 아리마를 잇는 공사로, 34.5km에 달하는 거리였는데요. 당시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은 약 1200명에서 1800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공사 현장에서 토사 붕괴로 사망하거나, 석재에 깔리거나 트럭에 치여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이 셀 수 없을 정도이고요. 하지만 정부는 강제 동원 이전 조선인 노동자 피해 사례를 단 한 차례도 조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국민총동원령 이전에도 끌려간 사람들이 많고, 또 광복 후에도 피해를 당한 경우가 많을 텐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보상 뿐 아니라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니, 이제라도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제 강제 징용은 남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었어요. 여성들만 따로 동원하기도 했었잖아요.

심유철 기자 ▷ 네. 바로 근로 정신대인데요. 일본은 1944년 8월, 여자정신 근로령을 공포하고, 초등학교 6학년이나 졸업생을 대상으로 모집을 빙자한 강제 동원에 나섰습니다. 본래 정신대는 국가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조직이라는 의미로, 여러 분야의 전쟁 지원 단체에 붙어 사용되던 단어인데요. 전쟁이 계속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근로 정신대가 조직되어, 전쟁 수행을 위한 노역에 투입되기 시작, 주로 군수공장에서 일을 시킨 것이죠.

김민희 아나운서 ▶ 지하 탄광이나 전쟁에 나갈 수 없는 여성들은 군수공장에서 군복을 만들고, 부품을 만드는 일을 한 건데요. 그와 관련해서 이미 여러 증언들이 나왔죠?

심유철 기자 ▷ 네. 확인된 바로, 1944년 봄에 취업 및 진학을 시켜준다고 꾀어 당시 12세에서 14세의 소녀들을 충청남도와 전라남도에서 모집한 뒤 미쓰비시 중공업의 군용 항공기 공장에서 임금을 전혀 주지 않고 강제로 노동을 시켰습니다. 그 공장에서 강제로 노동한 조선인 여성은 약 400명으로 파악되고 있고요. 또 경상북도 등지에서 모집된 소녀들이 군수업체인 후지코시 철재공업주식회사 도야마공장에서 강제로 노역했다는 증언도 나와 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아직 어린 소녀들을 다른 이유를 들어 데려가서 공장에서 강제 노역을 시킨 건데요. 기획취재팀이 이와 관련한 피해자도 만났다고요?

심유철 기자 ▷ 그렇습니다.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 김정주 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요. 1945년. 13살이던 김정주 씨는 일본인 선생님의 권유로 일본 도야마 현의 후지코시 공장에 갔고, 하루 종일 서서 비행기 부품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임금은커녕, 식사도 부실해 미소 된장국, 식빵 반쪽이나 단무지 세 조각, 밥 한 덩이가 나왔지만, 그것마저 주지 않아 이름 모를 풀을 뜯어 먹기도 했고, 한 주먹씩 머리카락이 빠질 정도로 영양부족에 시달렸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잊고 살고 싶어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일 텐데요. 13살 소녀가 받은 상처는 누가 보상해주는 건가요? 

심유철 기자 ▷ 김정주 씨는 피해자들과 2003년 후지코시를 상대로 일본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습니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청구권 협정이 발목을 잡은 건데요. 재판을 거듭한 끝에 우리나라 법원에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받았고요. 법원은 1인당 1억 원 지급 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일본은 아직 보상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이런 식으로 일본이 시간을 끌다가는 결국 보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데요. 또 위안부 역시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역사에요. 

심유철 기자 ▷ 네. 일본은 자국 군인들에 의한 강간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무분별한 강간에 의한 성병의 만연으로 군인들의 전쟁수행능력에 큰 차질을 빚게 되자, 위안소라는 제도를 도입합니다. 전쟁 중이라도 전투지역 현지의 여성들은 방관하는 대신, 군인의 성욕을 해결해 줄 여성들을 따로 차출한 건데요. 위안소의 규정에는 계급별 사용시간, 요금, 성병검진 및 기타 위생사항이 제품설명서처럼 명기돼 있었고, 많은 군인들이 몰려들 때는 20명에서 30명 가까이 문 밖에서 긴 줄을 서며 순서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위안소에서 일하는 여성들 역시 강제로 끌려가거나, 사실과 다른 꼬임에 빠져 동원된 건데요. 그 피해자는 얼마나 될까요?

심유철 기자 ▷ 정확한 피해자 규모를 산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인데요. 대략 20만 명 정도로 추산만 하고 있지만, 그 중 한국 여성이 얼마나 되는지의 추정치도 밝혀진 게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바로 일본군 위안부임을 공개적으로 증언한 게 최초의 사례이고요. 최근에는 위안부가 아닌, 일본군 성노예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일본군이 조직적이고 제도적으로 저지른 범죄였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규정하겠다는 의미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라고 하는 건데요. 현재도 피해 할머니들은 계속해서 일본을 상대로 싸우고 있어요. 또 소송 역시 계속되고 있는데요.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소송을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요?

심유철 기자 ▷ 징용 피해자들의 긴 싸움이 시작된 것은 1997년입니다. 당시 74세였던 고 여운택 씨 등 징용된 피해자 2명이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건데요.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 배상금과 강제노동 기간 받지 못한 임금을 지급하라는 취지였지만, 2001년 오사카지방재판소는 원고 청구 기각 판결을 내렸고, 2002년 오사카 고등재판소는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도 원고 최종 패소를 선고했고요.

김민희 아나운서 ▶ 지급하지 않은 임금을 지급하고, 그로 인한 손해 배상을 하라는 것은 당연한 요구인데요. 일본의 재판관들은 인정하지 않았군요. 

심유철 기자 ▷ 네. 그래서 2005년 2월, 한국 법원에 다시 소송을 냈고, 1심과 2심은 서울고법은 일본 법원의 확정판결을 근거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일본 법원의 판결은 일제의 강제 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히면서, 배상청구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고요. 2013년 7월 신일철주금이 1인당 1억 원의 배상금을 지급할 것을 판결했지만, 신일철주금은 재상고했고, 여운택 씨는 같은 해 12월 확정판결을 보지 못한 채 별세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어떻게 보면, 이 소송을 개인이 진행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죠. 당연히 정부가 나서야 할 문제지만, 그냥 있기에는 억울하고 분하니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건데요.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소송이 계속되고 있죠?

심유철 기자 ▷ 네. 한국에서 제기된 첫 소송은 2000년 고 박창환 씨 등 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1억 원의 위자료 청구 소송입니다. 부산지법과 부산고법은 청구 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기각했지만, 부산고법은 2013년 7월 피해자 유족에게 각각 8000만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습니다. 하지만 미쓰비시는 이에 불복해 또다시 상고했고, 17년이 넘는 긴 재판 도중 이미 피해자 4명이 사망한 상태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야속한 시간만 흐르네요. 그런데 최근 그와 관련해서, 일본의 잘못을 인정하는 재판 결과가 나왔다고 들었어요.

심유철 기자 ▷ 네. 징용을 당한 조선인 피해자들에게 일본 전범 기업이 위자료 배상을 해야 한다는 국내 법원 판결이 나온 건데요. 광주지법은 김재림 씨 등 4명이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징용의 불법행위를 인정하고, 미쓰비시가 원고들에게 각 1억 원에서 1억 500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했고요.

김민희 아나운서 ▶ 그 돈으로 강제 징용의 기억이 다 보상되는 건 아니지만, 작은 위로라도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심유철 기자 ▷ 문제는, 판결이 나와도 소송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전범 기업들이 한국 법원의 손해배상 판결에 불복해 항소와 상고로 맞대응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실제로 현재까지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전범 기업을 상대로 국내에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모두 15건에 이르지만, 마무리된 소송은 단 한 건도 없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판결이 나와도 의미가 없는 거네요. 심기자, 시간이 많지 않은 징용 피해자들이 사과와 보상을 받을 길은 없는 걸까요?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지금까지의 정부 입장과는 조금 다른 입장을 밝혔잖아요. 

심유철 기자 ▷ 네. 문재인 대통령은 일제에 의한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 문제에 대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제시했는데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징용 문제는 한일기본조약에서 해결된 문제가 아니냐는 일본 언론의 질문에, 양국 간 합의가 개개인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양국 간 합의에도 불구하고 징용당한 개인이 미쓰비시 등 회사를 상대로 갖는 민사적 권리는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한국 헌재나 대법원의 판례라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개인이 진행하고 있는 소송에 힘이 실리고 있는 상황이고요.

김민희 아나운서 ▶ 네. 독일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을 직접 찾아가 희생자들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반대로 모든 걸 부인하고 부정하고 있습니다. 단 한 차례 진정한 사과도 없었고요. 이렇게 시간만 보내다가, 결국 남아있는 생존자들이 다 사망한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라며 키워드 포착 마칩니다. 심유철 기자, 감사합니다.

심유철 기자 ▷ 네. 감사합니다. 

tladbcjf@kukinews.com

심유철 기자
tladbcjf@kukinews.com
심유철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