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후 국회 정론관. ‘레진 불공정행위 규탄연대’가 카메라 앞에 섰다. 앞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게임개발자연대, 대한출판문화협회 등이 '레진 사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한 바 있었고, 최근에는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별도로 조사단을 꾸리는 등 레진코믹스를 둘러싼 갈등은 일파만파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날 진행된 기자회견은 많은 주목을 받았다. 작가들은 웹툰 플랫폼인 레진코믹스가 ‘작가주의’라는 초심을 찾으라고 촉구했다. 짧은 기자회견이 끝나고 단상에서 내려온 작가들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레진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레진이란 플랫폼 사업자의 콘텐츠 제작자에 대한 횡포 때문이다. 플랫폼은 그 안을 채우는 콘텐츠가 있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콘텐츠 소비자의 종착지인 플랫폼의 권력은 사실 소비자의 것을 빌려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빌려온 권력이 비정상적으로 운용될 때다. 콘텐츠의 다양성과 가치와는 상관없이 플랫폼의 입맛에 맞는 것만이 선택되는 행태는 비단 레진만의 문제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일개 콘텐츠 따위는 완전히 사장시킬 수 있는 힘. 이것이야말로 플랫폼이 지향하는 권력이다. 그리고 이는 매우 자주 콘텐츠 소비자의 기호로 둔갑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발생하는 불공정 행위는 내부자의 폭로 없이는 드러나기도 어렵다.
◇ 현재까지의 레진잔혹死
레진코믹스를 둘러싼 논란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다수의 언론들은 이미 레진의 이른바 ‘작가 죽이기’를 고발한 터. 그리고 이를 폭로한 ‘내부자들’은 오랜 기간 레진 측과 작업한 미치 작가와 은송 작가다. 이들은 레진의 이른바 ‘블랙리스트’ 피해 작가이기도 하다.
사태가 본격화된 시기는 지난해 5월. 미치 작가와 은송 작가는 소셜미디어에 작가 복지 및 업무 환경 개선을 촉구하는 글을 올렸다. 이후 이들의 작품은 레진의 모든 프로모션에서 배제됐다. 레진의 홈페이지에서 이들의 작품은 굳이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구석으로 밀려났다. 독자들의 유입이 줄자 수입도 반 토막이 났다.
석 달 후인 8월, 레진은 웹소설 서비스를 중단 조치했다. 100여명의 작가는 하루아침에 ‘밥줄’이 끊겼다. 항의가 이어졌다. 레진은 항의하는 작가들을 ‘강성작가’로 분류, 관리했다. 이 과정에서 작가들의 개인 소셜미디어를 들여다보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작가들은 레진의 이러한 ‘훔쳐보기’를 ‘사찰’로 불렀다.
결국 청와대에 ‘웹툰 플랫폼 레진코믹스에 대한 세무조사를 부탁드립니다’란 청원이 올라오기에 이른다. 레진 측이 일부 작가에게 3년 동안 해외 수익을 정산하지 않았고, ‘지각비’조로 마감을 지키지 못한 작가의 월수익 일부를(최대 9%) 뗀 사실이 처음 대중에 폭로됐다. 심지어 암 투병을 하던 작가에게도 1천여만 원의 ‘지각비’를 가져간 사실이 알려지자 공분이 일었다. 8만여 명의 시민들이 청원에 동의하는 등 레진을 향한 비판 여론이 사납게 일었다.
레진은 입장문을 통해 정신 지연의 이유를 에이전시의 잘못이라고 해명했다. 그 과정에서 작가의 동의 없이 수입을 공개해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다시 레진에 대한 비판 보도가 이어지자, 그제야 회사는 업무상 잘못이 있음을 인정했다.
이후 상황은 어떻게 됐을까? 결과부터 말하자면 ‘극단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레진 측은 작가와의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해외서비스를 중단시키거나 콘텐츠 판매가를 변경하는 등 갈등은 계속됐다. 또한 문제제기 전면에 섰던 미치 작가와 은송 작가는 콘텐츠 게재 계약 해지를 당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레진은 이들 작가에게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허위 사실을 유포했단 이유에서였다. 레진 불공정행위 규탄 연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규탄문을 발표했다.
“블랙리스트 존재와 내부문건 증거까지 공개한 언론사에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던 레진코믹스가 오히려 피해자에게 법을 들이밀었다. 작가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전형적인 기업의 보복성 갑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불어민주당 유은혜 의원은 레진 사태와 관련해 “국회 상임위 차원의 대응책 마련을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 레진이라는 중간 지대
레진 사태에선 기시감이 든다. 국내 노동사에서 부당행위를 비판하는 노동자를 찍어내고 손해배상·가압류로 괴롭히는 사측의 대응이란, 한국만의 ‘전매특허’다. 사측의 노동자 탄압 행태의 전형은 레진 사태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과거 제조업에서 빈번했던 이 같은 노동자 탄압 행태가 콘텐츠 플랫폼으로 기업의 업종만 달라졌을 뿐이다.
레진 사태는 플랫폼 사업자의 횡포에 대한 거의 최초의 노동 분쟁이다. 4차 산업혁명을 위시해 플랫폼 사업은 머지않아 과거의 제조업을 뛰어넘게 된다. 레진 사태는 과거의 노동 투쟁사가 현재로 이어지는 딱 중간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여러 시사점을 갖는다.
흥미로운 점은 레진 사태를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다. 대다수 레진 사태를 전하는 언론들은 피해 작가의 편에 서 있는 형국이다. 언론의 이러한 ‘포지션’은 순전히 저널리즘이나 진실 규명, 약자 보호의 발로만일까? 이는 피상적이며 순진한 해석이다.
현재의 레진이 비교적 매출 규모가 크지 않고 언론과의 ‘특수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은 신생기업이란 점을 고려해보자. 10년 후 레진의 규모가 지금보다 수 배 커지고 언론에 활발히 광고 집행을 하고 등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어떨까. 과연 지금과 같은 논조를 유지할 수 있을까. 뉴스 유통에 결정적인 힘을 쥔 네이버와 카카오에 대한 언론의 철저한 ‘침묵’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따라서 중간지대에 위치한 레진 사태의 해결은 향후 콘텐츠 플랫폼과의 분쟁 과정에서 중요 변곡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태 해결의 당위는 비단 작가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의 바람과 더불어 향후 산업 분쟁 및 노동사에 있어 다양한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