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현빈은 화를 잘 안 내는 사람이다. 주변의 평가도 그렇지만, 스스로도 화가 나면 혼자 삭히는 타입이라고 말한다. 그런 현빈이 악역으로 변신했다. 그것도 사람을 스스럼없이 죽이는 인질범으로. 영화 ‘협상’(감독 이종석) 개봉을 앞두고 서울 팔판로의 한 카페에서 마주앉은 현빈은 “관객들이 제 색다른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제가 ‘협상’이라는 작품을 선택하고 촬영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가장 걱정됐던 건 민태구라는 역할에 관해 제가 받아들인 만큼 관객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거였어요. 제가 소화하는 악역이 생소한 분들도 계실 거고, 이 영화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들도 계실 것 같았거든요. 물론 재미있게 본 분들도 계시겠죠. 반반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모두들 흥미로워하시는 건 같을 거라 생각했어요.”
‘협상’은 거의 모든 분량이 이원 촬영방식으로 제작됐다. 배우들이 다른 방에서 서로의 연기를 모니터로 봐 가며 실시간으로 연기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미리 촬영한 후 다른 배우가 촬영 분량에 맞춰 연기하는 방식이 즐겨 사용됐다. 하지만 ‘협상’은 손예진과 현빈의 전적인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생소한 소재도 그렇고, 도전한다는 기대감으로 촬영에 임했어요. 오로지 인이어를 통해 손예진씨의 호흡과 목소리를 들어가며 연기해야 한다는 게 처음에는 참 이질적이더라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점점 새로운 연기 지점을 찾아가는 재미가 생겼어요. 작고 답답한 공간에서 태구가 갇혀있거나 행동에 제한을 받는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힘썼고, 수없이 많은 계산을 해가며 연기했죠. 저 한 사람 안에서 많은 변주를 주려고 했어요.”
현빈의 악역 변신이라는 점만으로도 ‘협상’은 그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간 로맨틱하거나 달콤한 인상이 강했던 배우이니만큼 현빈 본인에게도 재미있는 도전이었다.
“제 나름대로는 계속, 데뷔한 이후 이미지 변신은 계속 하고 있지만 그 폭이 얼마나 되느냐 생각해보면 이렇게 큰 일은 몇 번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대중들이 제게 갖고 있는 이미지는 어느 정도 한정돼 있죠. 하지만 저는 항상 제 필모그래피 안에서 다른 변주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악역 변신이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크지만, 또 생각해보면 스펙트럼을 넓힌다는 부분에서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죠. 지금 찍고 있는 드라마도 전혀 다른 소재인데, 계속해서 새롭고 다양한 소재를 전달해드리고 싶어요.”
현빈이 최근 선택한 영화들은 오락적인 요소가 강하다. “순간을 즐기고, 자극이 오고, 시간이 지난 후에는 생각을 좀 해볼 수 있는 영화들”이라고 현빈 본인은 표현했다. 현빈이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으면서 그리는 큰 그림은 무엇일까.
“개인적인 목표는, 나중에 제 필모그래피를 다른 사람들이 돌아봤을 때 ‘위안이 되는 배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거예요. 이 배우의 작품을 보면서 여운이 남았든, 아니면 러닝 타임 두 시간동안 아무 생각이 없었든, 같이 웃었든. 현실에서나마 잠시 벗어나 위안을 주었던 배우였으면 해요. 제게도 분명 그런 작품이 있었거든요. 순간이나마 시름을 잊고 저에게서 대중이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그저 거기 만족해요.”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