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스물두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스물두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2-08 18:00:00

나폴리에 가까워진 듯 왼쪽 창밖 정상 쪽으로 흰 눈을 뒤집어 쓴 산이 나타난다. 봉긋하게 솟았다면 유려한 곡선을 그렸을 텐데…, 봉우리의 상당 부분이 찌그러진 모습이 안쓰럽다. 분명 화산활동의 결과일 터이니 베수비오 화산(Monte Vesuvio)이 틀림없을 것이다. 

베수비오 화산은 아프리카판과 유럽판이 수렴하는 경계에 있는데, 아프리카판이 유럽판 밑으로 밀고 들어가는 에너지가 화산활동의 원동력이 된다. 낙타 등 모양으로 두 개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데, 높이 1281m인 주봉우리를 그란 코노(Gran Cono)라 하고, 높이 1132m로 조금 낮은 봉우리가 소마산(Monte Somma)이다. 멀리서 보면 쌍봉낙타의 등을 닮았다. 두 봉우리는 5㎞ 길이의 아트리오 디 카발로(Atrio di Cavallo) 계곡으로 구분된다.

베수비오 화산은 나폴리만에 흩어져 있는 몇 개의 화산들로 구성되는 캄파니아 화산호(火山弧)에 들어간다. 베수비오 화산에서 수㎞ 북서쪽에 있는 캄피 플레레이(Campi Flegrei), 20㎞ 서쪽 이스키아(Ischia)섬에 있는 에포메오(Epomeo) 산, 남쪽 바다 속에 있는 팔리누로(Palinuro), 바빌레브(Vavilev), 마르실리(Marsili) 그리고 마냐기(Magnaghi) 등의 해저화산 등이 해당된다. 

베수비오 화산의 그란 코노의 칼데라는 1만7000년 전 분화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폼페이의 비극을 일으킨 기원전 79년의 대폭발이 있기 전 선사시대에도 많은 분화가 있었다. 그 가운데 기원전 1800년의 아벨리노(Avellino) 분화는 베수비오 화산 가까이에 있는 여러 곳의 청동기 정착촌을 덮쳤다고 전해진다. 

가장 최근의 참혹한 분화는 서기 79년 10월 24일에 일어났다. 당시 화산석과 화산재 그리고 화산가스의 구름이 33㎞ 높이까지 솟구쳤으며, 용암과 분쇄된 경석을 초당 6×105㎥의 속도로 쏟아냈다. 당시 방출된 열에너지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폭탄의 10만 배에 해당한다고 했다. 

결국 베수비오 화산 아래 있던 폼페이(Pompeii)와 헤라쿨라네움(Herculaneum)이 화산폭발로 파손됐고, 수십m 두께의 테프라(tephra, 화산에서 쏟아져 나와 퇴적한 화산 쇄설물)에 파묻히고 말았던 것이다. 화산폭발로 인해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인명피해가 이렇게 컸던 것은 그해 8월 20일부터 작은 지진이 이어졌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서기 62년에도 지진이 일어나면서 오염된 공기 때문에 600마리의 양이 죽었다고 했다. 그만큼 이 지역 사람들은 지진 등 화산분화에 선행할 수 있는 예비신호에 둔감했던 것이다. 화산분화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피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의 치안판사를 지낸 가이우스 소(少)플리니우스 주니어는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에서 희생된 삼촌 대(大)플리니우스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남긴 것이 폼페이의 비극에 관해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뒤늦게 배를 타고 나폴리만을 빠져나가려던 사람들마저도 나폴리만을 덮친 쓰나미에 배가 침몰되는 바람에 몰살당하는 비극으로 끝났던 모양이다.

서기 79년의 비극 이후에도 35회나 되는 분화가 더 있었고, 1631년 12월 분화 당시 흘러내린 용암이 많은 마을을 덮쳐 약 3000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의 분화는 1944년의 것이다. 이 분화는 최근 100년 내에 유럽대륙에서 일어난 유일한 화산활동이기도 하다. 베수비오 화산 지역은 1995년 6월 5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정상까지도 접근이 가능한데 정상에서 200m까지는 도로로 접근이 가능하고 그 위로는 산책로를 걸어서 갈 수 있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보면 1786년 3월 초 나폴리를 찾은 괴테는 3차례에 걸쳐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구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두 번째는 화산재와 화산탄이 날리는 가운데, 세 번째는 용암이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올라갔다고 하니, 폼페이의 비극을 겪은 뒤에도 사람들은 화산의 무서움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괴테는 그 순간을 이렇게 적었다. “먼저 깊은 분화구 밑바닥으로부터 굉음이 울려오고, 다음에는 크고 작은 암석이 화산재 구름에 싸여서 수천 개씩 공중으로 내던져진다. (…) 무거운 놈이 쿵 하고 떨어져서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원추의 측면을 굴러 내려갔다. (…) 이 괴물 같은 화산이 단지 추하기만 할 뿐 아니라 위험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앞의 위험이란 것에는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이 있어서, 이에 대항하려는 반항심을 인간에게 일으킨다.”

베수비오 화산의 정상으로 가는 케이블카는 1880년에 처음 개통됐다. 푸니쿨리푸니쿨라(Funiculì, Funiculà)라는 노래를 만들어 케이블카를 홍보했다는 이야기는 오르비에토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 이 때 만든 케이블카는 1994년 분화가 있었을 때 파괴됐다. 베수비오 화산이 창문 뒤로 지나갈 무렵 폼페이(Pompeii)에 도착했다. 나폴리만의 안쪽 해안선의 북쪽 끝에 나폴리가 있다면 폼페이는 나폴리에서 남쪽으로 23㎞ 떨어진 만 안쪽의 남쪽 끝에 있다.

서기 79년 베수비오화산이 쏟아낸 용암과 화산재에 파묻힌 폼페이의 시작은 기원전 8세기 무렵 중부 이탈리아에서 온 오시(Osci) 사람들이 다섯 개의 마을을 이룬 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740년 무렵에는 그리스 사람들이 들어와 항구를 열고 해상무역을 시작했다. 기원전 524년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진출해 정착했지만, 기원전 474년 쿠마에(Cumae) 전투에서 승리한 그리스사람들이 지배하게 됐다. 기원전 343년 로마군이 쳐들어온 이래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로마제국 시절, 특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폼페이에는 원형극장을 비롯해 체육관과 수영장, 25개가 넘는 분수대, 4개 이상의 공중목욕탕이 건설됐다. 민간주택을 비롯해 공공건물에 물을 제공하는 수로 망이 건설돼있었다. 폼페이의 비극은 앞서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에서 설명한 바 있다. 

폼페이 유적은 베수비오 화산에서 8㎞ 떨어져있는데, 사르노(Sarno)을 따라 흘러내린 용암류가 덮쳐 만든 며느리발톱 모양의 지형을 이룬다. 지금은 해발 40m의 높이에 위치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해안가에 있던 항구마을이었다. 마을 면적은 64~67헥타르 규모였으며 가구 수로 미뤄 당시 인구는 1만1000~1만1500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폼페이가 화산재더미 속으로 사라지고 난 직후, 살아남은 집주인이나 도둑들이 폐허가 된 건물에 남아있는 대리석 조각을 비롯하여 귀중품을 발굴하기도 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잊혀진 폼페이가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592년이다.

사르노강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지하통로를 파던 중에 묻혀있던 도시를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벽화 몇 점을 발굴하고 덮어두었는데, 성적으로 지나치게 자극적인 내용의 벽화가 당시의 사회분위기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738년 부르봉왕가의 여름 궁전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이 재발견된 것을 계기로 폼페이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시작됐다. 

그 옛날의 폼페이는 동서와 남북을 잇는 각각 2개씩의 도로를 중심으로 구획이 잘 정리된 계획도시였던 모양이다. 여기에 더해 항구 쪽에서 포럼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더해져 모두 5개의 큰 도로가 있었다. 

폼페이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바로 마리나 게이트(Marina Gate)를 통해 폼페이 유적으로 들어갔다. 이름으로 보아 이 문 아래쪽에 항구가 있었던 모양이다. 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비너스 신전이 있고, 더 가면 왼쪽으로 아폴로신전이다.

아폴로 신전을 지나면 포럼이다. 포럼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사튀로스의 상이 서있다. 포럼의 북쪽에 주피터 신전이 자리하는데 그 뒤로 베수비오 화산이 서 있다. 

주피터 신전은 아마도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아폴로 신전을 개축하면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21x56x10 피트(feet) 크기의 성전에는 주피터, 주노, 미네르바 등의 동상이 들어있는 방이 있었고 이 방에는 성직자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주피터의 동상만이 있었다고 한다.

포럼을 사이에 두고 마리나길 건너편에 있는 비아 델아본단자(Via dell'Abbondanza)로 건너간다. 포럼으로 들어가는 도로의 턱에는 잘 다듬은 바위를 세워서 말을 타고 포럼에 진입할 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도로는 3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중앙에는 크고 작은 포석(鋪石)을 깔아놓았는데, 아마 마차나 말을 타고 지나는 길이었을 것 같다. 포석도로 양쪽으로는 거친 모래를 다져놓은 인도였을 것이다. 

인도와 포석도로의 경계는 턱이 져 있고, 도로의 중간에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때로는 물이 도로에 넘쳐흐르기도 해서 발을 적시지 않도록 한 장치라고 했다. 길 양편으로는 다양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고 하는데, 요즘으로 치면 셔터를 내리던 문턱이 있고, 문턱이 이중으로 돼있는 가게는 귀금속을 팔던 곳이었다고 한다. 

거리 곳곳에는 흘러내리는 물이 고이던 수조가 있고, 도로 양편으로는 가가호호 물을 공급하던 납관이 지나고 있었다. 길을 가다보면 포석도로 위에 혹은 담장에 남성의 거시기를 닮은 표시가 있다. 홍등가로 향하는 표지였다고 한다. 교역이 왕성했던 폼페이에서는 뱃사람을 비롯해 여행객을 위한 다양한 상점들이 번성했던 것인데, 홍등가도 한 몫을 했다는 것이다. 도로에 남아있는 남성의 성기문양을 보면서 우리를 안내하던 이탈리아 가이드가 ‘이탈리안 사이즈’라고 해서 한바탕 웃음이 일었는데, 우리 일행 가운데 한 분이 되받아서 ‘그럼 바지를 내려 보여 달라’고 해서 뒤집어졌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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