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서른세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서른세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3-22 19:45:35

오페라 극장 앞에서 길 건너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을 일별하는 것으로 로마구경을 마무리했다. 7시에 숙소를 나섰다고는 하지만, 불과 4시간 만에 영원한 도시 로마 구경을 끝낸 것이 아무래도 찜찜하다. 트레비분수에 동전을 던지지 않았으니 로마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길게 머물면서 찬찬히 뜯어볼 기회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일정을 맞추기 위해 11시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보니 조국의 제단을 다시 지나게 된다. 조국의 제단에서 콜로세움으로 향하는 길의 왼쪽으로 트라야누스 시장, 아우구스투스 포럼, 네르바 포럼을 차례로 지나게 된다. 운 좋게도 버스에 앉은 좌석이 왼쪽이었기 때문에 창밖으로 보이는 이 유적들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트라야누스 시장(Mercati di Traiano)은 2세기 초에 퀴리날레(Quirinale) 언덕의 경사면을 따라 지은 복합건물로서 로마제국의 창고, 상점 및 사무실 등의 용도로 사용하면서 상업과 행정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언덕을 깎아내서 만든 반원형의 공간의 호에 해당하는 부분에 건물들을 지었고, 공간의 맞은편 반지름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트라야누스 포럼을 만들었다.

시장과 포럼 사이에는 포장도로가 있다. 트라야누스포럼은 서기 106년에 끝난 다키아(Dacia) 정복 전쟁에서의 승리한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의 전승을 기리기 위해 113년에 지은 것이다. 300m 길이에 185m 폭을 가졌고, 중간의 양쪽으로 반원형 모양으로 돌출한 모양의 광장이다. 입구는 광장 북쪽에 있고, 직사각형 모양의 흰색 대리석 벽돌로 바닥을 깔았고,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마상을 세웠다.

트라야누스 시장을 지나면 아우구스투스 포럼(Foro di Augusto)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카이사르를 살해한 브루투스 일당을 필리피(Philippi) 전투에서 격파했다. 필리피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하여 로마의 군신 마르스를 모시는 신전을 짓기로 했다. 부지확보 등의 문제로 공사가 지연돼 40년이 지난 기원전 2년이 돼서야 불완전한 상태로 낙성을 보았다.

서기 19년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황제는 아들 드라수스(Drusus)와 조카 게르마니쿠스(Germanicus)가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마르스 사원 양쪽으로 두 개의 개선문을 세웠다. 중세 들어 이 지역이 자주 범람되어 늪지가 되면서 개선문은 아르코 데이 판타니(Arco dei Pantani)라고 부르게 됐다. 이탈리아어 판타니는 ‘수렁’이라는 의미다. 

아우구스투스 포럼 다음에 있는 것은 네르바 포럼(Foro di Nerva)이다. 로마제국의 포럼 가운데 네 번째로 건설됐으며 길이 131m에 폭 45m로 가장 작은 포럼이다. 서기 85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공사를 시작해 그의 후계자인 네르바 황제가 완공했다. 용암석인 페페리노암으로 만든 벽돌을 쌓고 대리석으로 외벽을 덮었다. 

포럼의 서쪽에는 미네르바 신전이 있었다. 포럼의 기둥 가운데 두 개의 주랑이 미네르바 신전의 측면에 기대어 겨우 살아남았다. 코린트양식의 기둥은 벽에서 불과 1.75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처마 장식 위의 벽공 가운데 하나에는 도미티아누스의 수호신인 미네르바의 부조가 새겨져있다. 처마장식에는 아라크네 신화가 묘사돼있다. 

소아시아의 리디아에 사는 아라크네는 베짜기와 자수를 잘했는데, 자기 솜씨가 아테나 여신보다 뛰어나다고 자랑하곤 했다. 자존심이 상한 아테나는 할머니로 변신해 아라크네 앞에 나타나 ‘신을 모독하지 말고 용서를 구하라’라고 충고했다. 아라크네가 그녀의 충고를 무시하자, 결국 시합이 벌어지게 됐다. 

아테나는 자신과 포세이돈이 아테네를 두고 승부를 겨룬 장면과 신에게 대항한 인간들이 욕을 보는 장면, 그리고 자신의 신목이자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를 수놓았다. 아라크네에게 경쟁을 포기하라는 암시였다. 한편 아라크네는 제우스와 여러 신들의 문란한 성생활을 뛰어난 솜씨로 수놓았다. 

아테나는 아라크네의 뛰어난 솜씨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지만, 신들을 웃음거리로 만든 자수내용에 분노해 직물을 찢고 말았다. 이런 아테나의 행동을 두고 ‘신이 인간에게 패배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포럼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가다보면 에스퀼리노 광장(Piazza dell'Esquilino)을 지난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Basilica Papale di Santa Maria Maggiore)의 뒤쪽에 있는 광장에는 에스퀼린 오벨리스크(Obelisco Esquilino)가 서 있다. 로마에 있는 13개의 고대 오벨리스크 가운데 하나로 14.75m 높이이나, 기초에서 십자가 꼭대기까지는 25.53m에 이른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모방해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이 오벨리스크는 1527년 아우구스투스황제의 영묘입구에 있는 퀴리날레 오벨리스크(obelisco del Quirinale)와 함께 발견된 것으로 보아 한 쌍으로 제작됐을 것이라 추정된다.

성모 대성당 또는 성모 설지전(聖母雪地殿)이라고도 하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성 베드로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등과 함께 고대 로마 양식의 4대 성전 가운데 하나다. 리베리오 대성당이라고도 하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리베리오 교황의 명에 따라 서기 360년경 건설됐다. 

이 성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최초로 봉헌된 성당으로 건축과 관련해 ‘눈의 기적’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아들을 갖고 싶어 하던 로마의 귀족 조반니 부의 꿈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해 다음 날 눈이 내리는 곳에 성당을 지으면 소원이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조반니가 교황에게 이 이야기를 드렸더니 교황 역시 같은 꿈을 꿨다고 했다. 352년 8월 5일 한여름 아침에 에스퀼리노 언덕 꼭대기에 눈이 하얗게 내려있었다. 교황 리베리오 시절 지은 대성당의 위치는 분명치 않으며, 지금의 대성당은 교황 식스토 3세(432-440) 시대의 것이다. 

에스퀼리노 광장에서 조금 더 가서, 로마 국립박물관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공화국 광장(Piazza della Repubblica)에 있는 폰타나 델라 나이아디(Fontana delle Naiadi)를 보게 된다. 우아한 거리의 대명사로 불리던 비아 나지오날레(via Nazionale)에 매력을 더하기 위해 1888년 알레산드로 구에리에리(Alessandro Guerrieri)의 설계로 지었다. 

처음에는 4마리의 석고로 만든 사자를 배치했던 것을 1910년 조각가 마리오 루텔리(Mario Rutelli)가 제작한 호수의 요정, 강의 요정, 바다의 요정, 지하수의 요정 등을 대표하는 4개의 조각 작품으로 교체됐다. 나이아디는 그리스 신화에서 강이나 샘에 사는 아름다운 소녀 모습을 한 물의 정령 나이아스를 말한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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