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인터뷰] 설경구 “’생일’, 마냥 슬프고 눈물 나는 영화 아니었으면”

[쿠키인터뷰] 설경구 “’생일’, 마냥 슬프고 눈물 나는 영화 아니었으면”

설경구 “’생일’, 마냥 슬프고 눈물 나는 영화 아니었으면”

기사승인 2019-04-04 07:00:00


“제가 느끼는 게 정일의 감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를 믿고 해야지 의심하면 답이 안 나올 것 같았죠.”

영화 ‘생일’(감독 이종언)을 보면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처음엔 ‘배우 설경구’로 보이던 정일의 모습이 점점 ‘정일’ 그 자체가 되어 간다. 아들이 사고를 당한 지 3년이 지난 후에야 한국으로 돌아온 정일은 관객과 같은 외부인이다. 자신의 집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가족들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른다. 관객들은 정일과 함께 아내 순남(전도연)과 딸 예솔(김보민)의 마음을 이해하고 주변인들을 알아간다.

최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설경구는 겨우 열흘 동안 찍은 영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종언 감독에게 “왜 정일이를 한국에 들어오게 했어요”라고 첫 질문을 던진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맡은 정일의 어깨를 타고 이야기의 주변부에서 시작해 조금씩 삼켜 들어가는 설정이 재미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순남을 관객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 설경구는 ‘생일’의 출연을 결심한 이야기부터 들려줬다.

“처음엔 스케줄이 안 됐어요. 제작사 대표님이 시나리오 책을 주면서 꽤 긴 설명을 해주셨어요. 이 시나리오가 나오기까지 이종언 감독님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요. 막상 시나리오는 편하게 읽었어요. 몰입해서 봤고 진정성을 느꼈죠. 그 안에 한 가지 길이 아니라 잠깐씩이라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다 담으려 했더라고요. 그걸 보편적으로 확대하면 우리 이웃의 얘기 같기도 했어요. 정일의 설정도 묘했어요. 당사자이면서 관찰해야 하는 주변인 같은 당사자였죠. 그래서 마음을 바꿨어요.”

‘생일’에서 설경구는 쉽게 감정을 터뜨리지 않는다. 감정을 터뜨려도 될 것 같은 장면에서도 꾹꾹 누르는 그의 모습은 이전 영화에서 보던 것과 달랐다. 설경구는 애써 담담하게 연기한 이유를 정일의 입장에서 설명했다.

“피치못할 사정 때문에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설정이잖아요. 그 죄책감을 생각하면서 감정을 쓰는 걸 절제했어요.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슬퍼해’ 같은 느낌이었죠. 정일의 슬픔을 드러내선 안 될 것 같았거든요. 관찰자 입장에서도, 가장으로서 끌고 가는 입장에서도 그랬어요. 그래서 감정을 최대한 누르고 담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정일이 자기 생각에 빠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동생집에 가서 매제 말도 들어주고 아이들도 관찰하고 다 봤던 것 같아요. 현장에서 모니터하면서 ‘너무 다 보는 거 아냐’란 얘기도 들었지만 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3년이란 세월이 정일을 얼마나 낯설게 만들었겠어요.”

‘생일’이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삼았다는 점은 설경구에게도 부담이었다. 설경구는 “당연히 신경 썼다”면서 “국가적인 트라우마를 남긴 참사인데 그걸 신경 안 쓰고 했다곤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동시에 그 사건을 부인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했다. 떠올리기 싫은 관객도 있겠지만, 각자의 기억을 하나씩 끄집어내며 아파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설경구는 영화 ‘박하사탕’, ‘실미도’, ‘그놈 목소리’, ‘소원’, ‘1987’ 등 유독 실화 바탕의 영화를 많이 찍은 것에 대한 생각도 털어놨다.

“영화보다 현실이 더 잔인하다고 하잖아요. 제가 그런 영화들을 일부러 찾아서 하는 건 아니에요. 실제 사건이나 현대사를 다룬 영화가 저한테 들어와서 제가 선택한 거요. 아마 그 이야기가 좋았었나 보죠. 하지만 그랬듯이 영화를 찍기 전에 유가족이나 당사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하진 않아요. 그건 배우로서 풀어가는 것이기 때문이죠. 일부러 피한다기보다는 개입이 안 됐으면 하는 마음이 커요. 이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영화니까요. ‘소원’도 영화가 다 완성되고 나서 유가족을 뵀고 이번 ‘생일’도 그랬어요.”

설경구는 관객들이 ‘생일’을 보고 묘한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 예고했다. 슬픔을 강요하지 않는 영화의 태도 때문이다. 오히려 생일잔치에 함께 참여하는 느낌이 들고, 그것이 위로될 거라고 했다.

“’생일’을 보면 눈물 나죠. 슬프기도 하고요. 그런데 마냥 그러지만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영화는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녹아 있는 단면을 보여줘요. 이웃을 살펴봐 주고 생일 모임에 함께하는 마음으로 보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객석에 앉아있으면 어느 순간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지 않을까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씨제스 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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