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일곱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일곱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5-06 04:00:00

이윽고 버스가 아담한 마을에 들어섰다. 뤼데스하임(Rüdesheim)이다. 나헤 뤼데스하임(Rüdesheim an der Nahe)과 구별하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라인 뤼데스하임(Rüdesheim am Rhein)으로 칭하는 뤼데스하임은 라인 강변의 대표적인 와인양조마을이다. 인구 1만명 규모의 라인 뤼데스하임은 헤센주의 다름쉬타트(Darmstadt) 레지룽스베지르케(Regierungsbezirke: 중급의 지방정부로 우리나라로 치면 군(郡)에 해당되지 싶다)의 라인가우-타우누스 크라이스(Rheingau-Taunus-Kreis)에 속한다.

이 지역에는 기원전 7세기 무렵 켈트족이 처음 정착했다. 기원 전·후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우비(Ubii)부족이 차지했고, 뒤이어 마치아치(Mattiaci)부족이 들어왔다. 서기 1세기 무렵 로마인들이 자리했지만, 로마제국이 무너진 다음에는 프랑크족이 마을의 꼴을 갖추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크족이 살던 장소(Frankish Haufendorf, 프랑키쉬 하우펜도르프)에서는 지금도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유리를 사용했고, 이미 포도주를 생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버스가 언덕길을 올라 주차장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뤼데스하임에 도착하면 마을에서 출발하는 리프트를 타고 언덕 위에 있는 니더발트기념비(Niederwalddenkmal)까지 올라가는 일정이 예약돼있었던 것인데, 버스 기사가 기념비 주차장으로 그냥 올라갔던 것이다. 일정을 의논하는 가운데 오해가 생겼을 수도 있었겠지만, 뒷날 버스 기사의 행동거지를 보면 인솔자가 설명하는 일정을 흘려듣고는 자기 생각대로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 인솔자도 만만치 않아서 결국 버스를 되돌려 마을 안에 있는 자일반호프(Seilbahnhof, 리프트 탑승장)로 이동했다. 이곳의 리프트는 두 사람이 타는 작은 규모의 승강기가 적당한 간격으로 출발하는 방식이다. 아내와 함께 오붓하게 리프트에 들어앉아 널따란 포도밭 위를 지나면서, 보름밤에 리프트를 타고 간다면 ‘해리포터’의 한 장면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빗자루 대신 리프트를 타고 날아가는 것이지만, 멀리서 보면 리프트가 빗자루처럼 보이지 않을까?

포도밭은 언덕 위의 니더발트(Niederwald: 벌목 후 새롭게 생성되는 관목림, 맹아림(萌芽林)을 의미하는데, 독일 서남부 타우누스(Taunus)의 산등성이 이름이다) 아래부터 강변에 이르는 언덕을 따라 널따랗게 펼쳐진다. 자세히 내려다보니 포도나무 밑동이 꽤 굵다. 오래된 나무인 듯하다. 중간에 누렇게 말라가는 나무들도 있고, 어린 포도나무를 심은 곳도 있다. 

드넓은 포도밭 사이에서 트랙터 한 대가 바삐 움직이는데 보니 웃자란 포도나무 가지를 쳐내고 있었다. 가지를 키우는 것보다는 포도열매로 영양분이 들어갈 수 있게 하려는 모양이다. 포도원은 라인 강의 북쪽 언덕을 따라 조성됐을 뿐 건너편 남쪽 언덕에서는 볼 수 없다. 남향의 언덕에 조성한 것은 당연히 햇볕이 잘 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해 라인 강에 반사되는 햇빛까지도 포도나무가 받을 수 있도록 고려한 점이 참 대단하다.

리프트에서 내려 조금 올라가면 니더발트기념비(Niederwalddenkmal)가 있다. 인솔자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전승비라고 설명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독일제국이 창설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1871년 9월 16일에 독일제국의 빌헬름 1세 황제가 초석을 놓았고, 1883년 9월 28일 준공식이 거행됐다. 

독일인들의 연합을 상징하는 38m 높이의 기념비는 카를 바이스바흐(Karl Weißbach)가 건축을 맡았고, 좌대 위에는 황제의 왕관을 오른손으로 들고 왼쪽에서 제국의 검을 잡은 10.5m 크기의 게르마니아(Germania) 상을 세웠다. 기념비의 조각 작품은 조각가 요하네스 쉴링(Johannes Schilling)이 제작했다.

게르마니아 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있다. “모든 독일 사람들이 공감하는 무적의 분기(奮起)와 독일 제국의 재기(再起)를 기념해, 1870-1871(“ZUM ANDENKEN / AN DIE EINMUETHIGE / SIEGREICHE ERHEBUNG / DES DEUTSCHEN VOLKES / UND AN DIE / WIEDERAUFRICHTUNG / DES DEUTSCHEN REICHES / 1870–1871)”

좌대의 아래에는 말을 탄 빌헬름 1세 황제를 장군과 병사들이 따르는 모습을 새긴 부조가 있고, 그 아래에는 독일의 군가 ‘라인 강의 파수꾼(Die Wacht am Rhein)’의 가사가 새겨졌다. 부조의 왼쪽에는 ‘평화의 동상’을, 오른쪽에는 ‘전쟁의 동상’을 세웠다. 

‘라인 강의 파수꾼’은 16세기부터 내려온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적대적 감정을 바탕으로 막스 쉐네켄브루거(Max Schneckenburger)가 1840년에 쓴 가사에 1854년 카를 빌헬름(Karl Wilhelm)이 곡을 쓴 것이다. 보불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애창됐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깔려있는 적대감정은 프랑스인의 뿌리인 골족과 독일인의 뿌리인 게르만족 사이의 민족적, 문화적 차이에서 쌓여온 것이다.

‘라인 강의 파수꾼(Die Wacht am Rhein)’ 1절은 “외침소리 마치 우레와 같이, / 파도와 같이, 칼날 부딪는 소리와 같이 울리네 / 라인 강, 라인 강, 우리 독일의 라인 강. / 누가 이 강의 파수꾼이 될쏘냐?(Es braust ein Ruf wie Donnerhall, / wie Schwertgeklirr und Wogenprall: / Zum Rhein, zum Rhein, zum deutschen Rhein, / wer will des Stromes Hüter sein?)”이다.

후렴은 “조국이여 두려워 말지어라, / 조국이여 두려워 말지어라. / 굳세고 충실한 파수꾼, 라인 강의 파수꾼! / 굳세고 충실한 파수꾼, 라인 강의 파수꾼!(Lieb Vaterland, magst ruhig sein, / lieb Vaterland, magst ruhig sein, / Fest steht und treu die Wacht, die Wacht am Rhein! / Fest steht und treu die Wacht, die Wacht am Rhein!)”이다. 

니더발트기념비에 바라보면 눈앞에 펼쳐지는 경치가 참 장관이었다. 기념비 아래로는 라인 강변까지 드넓은 포도원이 펼쳐지고, 강 건너 마을이 손에 잡힐 듯하다. 라인 강에는 커다란 배들이 꼬리를 물고 오가는데 넓은 강이 모두 수심이 깊은 것은 아닌 듯하다. 알프스에서 발원해 북해로 유입되는 라인 강과 역시 알프스에서 발원해 흑해로 흘러가는 다뉴브 강은 운하로 연결돼있어 흑해와 북해를 오갈 수 있다.

바로 독일 바이에른 주에 있는 총연장 171km의 RMD(라인-마인-도나우) 운하다. 1846년 RMD 운하가 개통됨에 따라 14개 유럽 국가들이 연결될 수 있었다. RMD 운하는 마인 강 상류의 밤베르크에서 출발해 뉘른베르크를 거쳐 도나우 강 상류의 켈하임으로 이어진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라인 강 하구에서 루마니아의 도나우 강 하류에 이르는 총 연장 3500여 ㎞의 수로에 배가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니더발트기념비에서 라인 강을 샅샅이 살펴보아도 양안의 마을을 연결하는 다리를 볼 수가 없다. 실제 뤼덴스하임에서 라인강 건너편 가울스하임(Gaulsheim)으로 가려면 배를 타야 된다고 한다. 차도 예외는 아니어서 페리를 탄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라인 강을 사이에 두고 적대세력이 대치하고 있다면 안보 차원에서의 고려일 수도 있겠지만, 독일 영토 내에서 불편함을 감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참을 생각해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강 건너 마을 너머로 풍력 발전을 하는 바람개비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서있다. 대체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한 독일 정부의 노력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강 건너에서 서쪽으로 더 가면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지방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을 보면 바덴바덴 위쪽에 있는 카를스루에(Karlsruhe)를 향해 꼭짓점을 둔 삼각형 모양으로 국경이 찌그러진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은 프랑스 영토에 속하는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은 독일어로는 엘자스-로트링겐(Elsaß-Lothringen)이라고 부른다.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의 단편 ‘마지막 수업’에서는 프랑스 영토인 이 지역에 독일군이 진주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지역을 지배한 세력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바뀌어왔다. 그 배경에는 알자스 지역은 온화한 기후 덕에 포도주 등의 농산물과 목재가 풍부하며, 로렌 지방은 철광석의 매장량이 풍부한 자원의 보고라는 점이 깔려있었다. 

알자스와 로렌 자체도 오랜 옛날부터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달랐던 것을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신성로마제국을 성립시킨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 통합됐던 것이다. 샤를마뉴 대제의 뒤를 이은 루트비히 경건왕 사후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눠 준 것이 분쟁의 시초가 된 셈이다.

어떻든 알자스-로렌 지역은 922년 하인리히 1세가 통합해 신성로마제국에 속하게 됐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이 지역에 대한 통제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알자스-로렌 지방의 지배권은 자주 바뀌었다. 16세기 중반 신성로마제국에서 벌어진 신교파와 구교파 간의 갈등에 개입한 프랑스는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가다가, 30년 전쟁이 끝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해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끝나고, 프랑크푸르트 조약에 따라 알자스-로렌은 새로 만들어진 독일 제국의 영토로 되돌려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잠시 알자스-로렌 독립 공화국으로 있다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됐다. 정말 우여곡절, 사연 많은 땅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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