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용어를 종종 들어봤을 겁니다. 국내에서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선전)로 정권 창출과 관련된 의미로 사용합니다. 일본의 경우 버블 시대 이후 정체된 일본 경제 상황을 설명할 때 종종 쓰이곤 합니다.
일본 경제는 80년대 중후반 미국 경제를 위협할 만큼 급속도로 성장해 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누린 적이 있습니다. 정기 예금금리가 8%였고, 취업도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거품이 꺼진 80년 대 후반부터 불황기에 접어들었으며,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과거와 같은 역동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회경제적 배경 탓인지 버블시대 전후를 다루는 드라마(혹은 영화)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지난해 영화로 상영된 ‘국가부도의 날’이 공전의 히트를 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금융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 중 최고의 히트작은 단연 ‘한자와 나오키’입니다. “당하면 되갚아준다. 배로 갚는다!(야라레타라 야리카에스 바이가에시다 やられたらやり返す! 倍返しだ!)”라는 명 대사가 큰 인기를 끈 작품이기도 합니다. 버블 시대 이후 은행원 한자와 나오키의 활약상을 다룬 이야기로 거품경제가 빠지고 부실해진 기업의 상황, 이 가운데 은행들의 부정융자, 은행 내부 권력암투 등을 다룬 드라마입니다.
또한 버블 경제 이후 부실한 기업을 먹어삼킨 뒤 수익을 내는 사모펀드를 소재로 한 드라마 ‘하게타카 (ハゲタカ)’도 한때 화제가 됐습니다. 이 드라마는 지난 2007년 일본 국영방송 NHK에서 방영한 뒤 지난해 리메이크된 바 있습니다.
◆ 한자와 나오키, 버블 시대 이후 금융권 내 암투=이 드라마는 원작 소설 ‘한자와 나오키(半沢直樹)’ 1~2부를 각색해서 만든 작품입니다.
드라마 상에서 무대인 산업중앙은행(産業中央銀行)은 버블경제의 붕괴 이후 부실채권을 감당할 수 없어지자 도쿄제일은행(東京第一銀行)과 합병 후 메가뱅크인 도쿄중앙은행이 탄생되고, 한자와 나오키는 합병 이후 과·차장급 위치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이 드라마는 2000년 이후 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최종회 방영 당시 온천 내 수면실에 있던 고객 모두가 한자와 나오키를 보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신한은행은 직원들에게 해당 드라마 시청을 권고할 만큼 금융권 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자와 나오키가 크게 인기를 끈 까닭은 버블경제 이후 침체된 일본 경제 상황도 반영됐지만 무엇 보다 한자와 나오키라는 인물이 가진 캐릭터가 많은 일본인들에게 큰 공감을 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명하복과 주종관계가 뚜렷한 일본 기업 문화에서 상사의 비리를 폭로하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한자와 나오키는 일본인들에게 이른바 ‘사이다(카타르시스)’를 안겨준 것입니다. 또한 일본 경제의 중심 축인 메가뱅크 내에서 벌어지는 권력암투,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사의 갑질, 불법대출 등도 상세히 그리고 있다는 점도 흥행의 한 요소로 볼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실제 드라마와 비슷한 사례가 일어난 바 있습니다. 지난 2014년 불법대출 의혹을 받던 우리은행 도쿄지점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한 농협중앙회가 캐나다 토론토의 주상복합건물 신축과 관련해 사기를 당해 210억원의 손실을 입은 적이 있고, 그 사실을 은폐한 것이 드러나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이는 2015년 국정감사 당시 김우남 의원(당시 새정치민주연합)에 의해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중소기업에 대한 갑질도 유사합니다. 드라마에서는 융자한 돈을 동의 없이 회수해 갑니다. 비 올 때 우산을 뺏은 격이죠. 국내의 경우 대출을 빌미로 예·적금, 펀드, 보험 등 금융상품 가입 강요도 하기도 합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IBK기업은행 등은 이른 바 ‘꺽기’(금융기관이 대출을 빌미로 중소기업에 금융상품 매수 요구) 의심거래가 많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 하게타카, 사모펀드 구세주인가 vs 약탈자인가=우리나라 말로는 콘돌(독수리)로 불리는 ‘하게타카’는 부실기업의 채권을 인수해 최대한 수익을 뽑은 뒤 고가로 팔아넘기는 사모펀드(벌처펀드, Vulture fund)에 대한 내용을 다룬 것입니다.
버블경제 이후 부실해져 가는 일본 기업을 잇달아 사들이는 외국계 펀드 매니저 와시즈와 일본 기업을 지키려는 엘리트 은행원 시바노의 대립이 주요 줄거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악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모펀드가 인수해 적자기업이 흑자로 돌아서게 되고, 관련 기업의 경영자들의 부정적인 언행도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국내에서는 과거 론스타와 같은 사례 때문에 사모펀드 혹은 헤지펀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합니다. 실제 국내에서는 소버린의 SK텔레콤 지분 인수 사태 후 사모펀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커졌습니다. 소버린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SK텔레콤에 2년4개월 동안 투자해 9000억원대 차익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모펀드가 항상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국내 첫 행동주의 펀드인 ‘강성부펀드’로 불리는 KCGI가 한진그룹의 지분을 사들이면서 오너 체제와 경영권 대결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어 OB맥주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모펀드 투자 이후 비용을 절감하는 구조조정 보다 공격적인 투자 및 운영방법 개선을 통해 회사의 벨류에이션을 끌어올리기도 했습니다. SK 역시 소버린의 공격적인 태도가 경영권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주가는 큰 폭으로 올랐습니다. 오히려 사모펀드의 행동주의 개입이 지배구조 개편에 역설적인 ‘보약’으로 작용했던 겁니다.
아울러 국내 진출한 외국계 사모펀드가 무조건 차익을 남기지는 않습니다. 그 악명높은 엘리엇매니지먼트도 삼성물산 합병 이슈에 파고들었지만 별다른 이익을 남기지 못했고, 이후 현대차그룹 주력 계열사 지분 1조원을 사들여 경영권 간섭을 시도했으나 현대차그룹주의 주가가 급락세를 보이면서 현재 속된 말로 ‘물려 있는’ 상태입니다.
유수환 기자 shwan9@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