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김종민(40). 그가 처음부터 영화를 하려던 건 아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온 비디오에 마음을 뺏겼다. 특히 ‘장군의 아들’이 좋았다. 영화를 보고 또 돌려봤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영화판을 기웃댔다. 그러다보니 감독이 됐다. 아직은 단편영화 두 편을 연출한 게 고작인 신출내기 영화감독이지만, 내놓는 작품마다 호평 일색이다. 두 번째 단편영화 ‘하고 싶은 말’은 ‘대한민국패럴스마트폰영화제’에서 동상을 수상했다. 토론토국제스마트폰영화제에 개막작으로 초청도 됐다.
지난달 30일 오후 인천의 한 카페에서 김 감독을 만났다. 그는 잘 웃었다. 웃으며 정곡을 잘 찔렀다. 이런 식이다. 커피 한 잔 마음껏 주문하지 못하는 삶이 있다고, 그런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이다. 이 글에 김종민의 필모그라피나 인생 역정이 얼마나 담길까. 장애인 영화에 천착한 김 감독의 속내를 조금은 엿볼 수 있었으니 만족할 수밖에. 기자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장애인뿐 아니라 라이따이한(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을 이르는 말), 다문화 가정 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 정말 하고 싶던 말
영화 ‘하고 싶은 말’의 주역은 김 감독 말고도 6명이 더 있다. 22~67세, 뇌병변·절단·지적 장애 등을 갖고 있는 장애인들이 그들이다. 토론토에서 돌아오는 비행기를 놓쳤다고 했다. 일정이 꼬였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그는 또 씩 웃었다. 영화제에서 관객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했다. "touched" 그러니까 '마음을 울렸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했다. 장애 자녀를 둔 한 관객은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고. 김종민은 그 순간을 “좋았다”고 표현했다.
작품은 용인시의 ‘장애인영화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제작됐다. 학교에는 장애인들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커리큘럼이 짜여 있었다. 그도 처음에는 강사로 참여했을 뿐이었다. 장애인에게 이런 교육이 시행된 건 처음이라고 했다. 사실 ‘비장애인’에게도 영화 제작은 몹시 생경한 일일테다. 그러다보니 연출은 자연히 김 감독의 몫.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작품이 완성됐다.
‘장애인 영화’의 단골 소재는 장애인의 이동권이나 인권 등이다. "보편적인 사랑, 그 사랑이란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가 말을 이어갔다.
“카페에서 활동보조인이 시켜주는 음료만 먹어야 하는 뇌병변 장애인이 사실 마시고픈 음료는 다를 수 있는 거죠. 이런 생각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했어요.” 잠시 인터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감정이 잠깐 동요되는 듯 했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 그가 다시 말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 달란 말이 누군가에겐 너무 어렵고 힘든 것일 수 있으니까.”
촬영은 이틀, 하루 촬영 시간은 3시간. 다들 영화 작업은 처음이었다. 더위를 참으며 촬영을 이거가기란 여간 곤욕이 아니었지만, "(이 모든 게) 처음이에요”란 장애인 친구들의 말에 힘이 불끈 났다. “우리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창작해가는 과정의 즐거움도 컸어요.”
대중교통을 6번 갈아타고, 2시간을 걸려 교육장에 도착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배우는 게 더 많았다. 김 감독은 “설명을 더 많이 해야 했고 더 큰 목소리로 강의를 해야 했지만 장애 당사자로서 교육을 한다는 게 뿌듯했다”고 웃어보였다.
김 감독의 첫 연출작은 ‘다리 놓기’라는 21분짜리 단편영화다. 이 작품의 중심도 장애인이다. 평단의 반응이 좋았다. 장애인영화제, 인천독립영화제 등에 초청됐다. “굳이 장애인 영화를 만들려고 한 건 아니에요. 저 역시 장애 당사자이고 인권운동을 하기도 했었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영화로 자연스레 표현된 거죠.”
현실은 예술가의 철학이나 가치관과 상관없이 흐르기 마련이다. 시나리오가 아무리 재밌어도 장애인영화에 투자하려는 이들은 많지 않다. "주변에선 봉준호나 박찬욱 처럼 같은 유명 감독이 아니면 절대로 장애인영화는 투자를 받을 수 없다고 했어요. 시나리오를 잘만 쓰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죠." 그는 첫 단편영화 제작비를 모으려고 2년 동안 자동차 딜러로 일했다.
◇ 소수자의 이야기
눈치챘겠지만 김종민 감독도 장애를 갖고 있다. 그는 왼손을 쓰지 못한다. 유년시절 주변에는 온통 비장애인뿐이었다. 남들의 다르다고 스스로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련이 있었다. “학교 다닐 때 놀리는 애들이 꼭 한 두 명은 있더라고요. 놀림을 못 참기도 했고, 처음에 약하게 보이면 1년 내내 고생할 것을 아니까 매년 학기 초마다 주먹다짐을 했어요. 강해보여야만 했어요.”
부모는 그가 앉아서 일할 수 있는 ‘공무원’이 되길 원했다. 체질에 맞지 않았다. 결국 선택한 게 ‘영화’였다. 1999년 한겨레 영화학교에서 본격적인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 그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투쟁에 뛰어들었다. 2년간 장애인들과 함께 먹고 잤다. 인권운동에 온몸을 던지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영화를 완전히 내려놓은 건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갔다. ‘여선생 VS 여제자’라는 작품에 제작부 막내로 영화판에서 뒹굴었다. 당시만 해도 영화판은 열정페이가 빈번했다. 제작부에서 일을 하다 교통사고가 났다. 빚도 졌다. 부동산에서 영업을 뛰어 간신히 빚을 갚고 다시 영화판으로 돌아갔다. ‘마음이’, ‘기다리다 미쳐’ 등 작품의 연출부를 거쳐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제3조감독으로 활동했다.
김 감독은 지난 6년을 오롯이 장편영화 준비에 매진했다. 이 작품도 장애인과 이주노동자 등 소수자의 이야기다. 상업영화를 희망하지만, 투자를 받지 못해 매번 좌절을 반복했다. 그조차도 “만약 똑같은 6년의 시간을 보내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며 손사레쳤다. 그렇지만 김 감독은 소수자의 내러티브를 내려놓지 못한다. 장애인이 출연하는 영화들이 늘었다지만, 해외에 비하면 아직은 갈 길이 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 갖는 사회가 되길.”
노상우 기자 nswrea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