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띠 해인 58년 태어난 이들은 대부분 평생 바빴다. 나도 그랬다. 부모님들은 희생했고 개띠들은 열심히 일해 보다 윤택한 삶을 얻었다. 그렇게 58년 개띠 세대는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기대지 않는 첫 세대가 되었다. 평생 일만했던 대부분의 58년 개띠들이 몇 년 전부터 직장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며 늙어갈지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다시 일자리를 찾아다닌다. 일이 가장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일하지 않기로 했다. 퇴직 후 넉 달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다가 아내와 긴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제주도는 1년 여정의 첫 여행지다.
나는 가난한 부모가 온 몸으로 키워낸 58년 개띠다. 아버지는 평생을 연탄공장에서 일했고 어머닌 안 해본 일이 없을 만큼 일을 가리지 않았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어서 온몸을 불사르며 삼형제를 키우던 부모님은 늘 나에게 ‘몸이 약하니 펜 쓰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몸 쓰는 일이 얼마나 힘에 겨웠을지 그 땐 몰랐다.
추첨으로 중학생이 되는 호사를 누렸다. 펜 쓰는 일을 하려면 고등학교는 좋은데 가야 한다고 해서,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두 개 싸들고 등교했다. 야간 자습까지 하고 집에 오면 11시가 넘었다. 저녁 먹고 씻고 12시에 잠들었다. 아직도 가끔 전화로 안부를 확인하는 담임선생님은 늘 ‘4당5락 (4시간 자면 합격이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을 외쳤다.
‘4당5락’의 주문이 효험이 있어서인지 운이 좋았기 때문인지 국립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 내야 하는 납부금이 없고 교복과 교과서는 물론 통학을 위한 무료승차권까지 제공되었으니 내게 찾아온 큰 행운이었다. 졸업하면서 부모님의 원 대로 펜 쓰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채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졸업과 동시에 공무원 발령을 받고 그 다음날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근무 시작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정년퇴직까지 40년간의 내 인생이 빤히 보였다. 그렇게 딱 정해진 삶을 살기는 싫었지만 그래도 당장 이 직장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 가슴에서 불덩어리가 꿈틀거렸다.
군복무를 마치고 기회를 얻어 27살에 대학생이 되었다. 이 행운이 내 삶에 두 번째 큰 변화를 줄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남들보다 8년이나 늦게 시작한 대학생활은 즐거웠다. 그러나 참 험하기도 했다. 군 복무 중 일어난 ‘10.26 사태와 광주사태’ 이후의 정국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펜 쓰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나로서는 그 사회의 흐름을 바라만 보았다.
서른 살이 되어 다시 사회에 나와 30년 동안 4 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결혼하고 아이 둘을 키워냈다. 부모님 보다는 훨씬 수월한 삶이었다. 부모님은 평생 노후 준비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나와 동생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탓인지 예순을 넘기며 큰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다. 그 뒷바라지는 거의 내 몫이었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이들이 차례로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시작할 즈음 나는 정년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동기동창들의 퇴직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퇴직 후의 생활을 위한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을 하고 있었다. 풍족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 역시 그랬다.
퇴직한 친구를 모임에서 만났다.
“요즘은 뭘 하고 지내?”
“일주일 중 하루는 봉사활동 가고 하루는 등산 가고...이제 남은 5일만 해결하면 돼.”
그러던 그가 얼마 후 다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남은 5일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한 듯했다.
난 다시 일하지 않고 놀겠다고 늘 말했다. 그들은 말했다.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서예를 다시 시작했다. 세상을 놀라게 할 서예가가 되고자 함은 아니었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내 글씨를 보기 위함이었고 그 핑계로 한자와 한문을 익히고 한시를 접하며 조급하지도 않고 게으르지 않은 노년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나 혼자만의 노후 생활이 아니니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여행을 준비했다. 주변 사람들이 말했다. 여행도 한두 해지...
우선 서울을 떠났다. 서울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천안에 넓은 아파트를 구했다. 더 아래 지역으로 가려 했지만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과도 타협을 해야 했다. 출퇴근을 하지 않으니 생활환경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인근의 여행지까지 쉽게 갈 수 있다는 또 다른 장점이 있었다. 이사 후 일주일에 한 번쯤은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이러한 나들이라면 정말 주변 사람들 말 대로 한두 해 지나면 시들해질 듯했다. 아내와 이야기 끝에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긴 여행을 계획했다. 제주도에서 1년 여행하고, 진도에서 한 달 여행하고, 해남에서는 두 달, 강진에서 석 달, 장흥에서 한 달 그리고 보성으로 넘어가 두어 달...
거의 무작정 온 제주도는 아내와 나의 첫 여행지다. 제주도에서는 1년을 보낸다는 것이 우리가 마련한 제주도 여행 계획의 전부다. 승용차에 들어갈 만큼의 생활용품을 박스에 담아 실었고, 추가로 다섯 박스는 택배발송을 했다. 그리고 7월 4일 아침 출발했다. 마치 며칠 근처에 다니러 가듯 마음이 가벼웠다.
시장, 병원 등의 생활편의시설, 산과 바다 접근성, 공항과의 거리, 관광지 분포, 버스 노선 등을 묻고 찾아본 끝에 제주시 인근의 바닷가 마을인 함덕에서 1년을 지내기로 했다.
주거할 집은 인터넷을 검색 등을 통해 사전에 몇 곳을 찾아 담당 부동산중개인과 통화까지 하며 확인했지만 막상 와 보니 통화할 때와는 조건이 달랐다. 이른 바 ‘미끼 매물’이었다는 의심이 들었다.
1주일의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함덕의 부동산중개업소를 무작정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번잡한 곳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고 버스정류장 가까운 곳에 꽤 괜찮은 조건의 집을 찾았다. 제주 시내와 공항까지는 차로 20분쯤 걸린다. 1년 치 사용료를 일시에 지불하고 제주도에 들어와 3일째 되는 날 입주했다. 생활에 필요한 추가 물품들 사 들이고 가져온 짐 정리하면서 삼일이 지나갔다. 아직 삼백육십이일이 남아 있으니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시작하고 있다.
한라산 북쪽의 잘 알려진 관광지부터 찾아다니며 길과 숲과 물을 눈에 익히고 다리에 힘이 붙으면 제주올레길 위에 서려 한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