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서른세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서른세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8-16 06:00:00

성모교회 앞에서 일행들을 만나 드레스덴 성 쪽으로 이동하면서 거리를 구경했다. 힐튼호텔 건물의 끝에는 마이센 도자기 매장이 있다. 진열장에 내놓은 찻잔과 작은 항아리가 참 예쁘다. 마이센 도자기 매장을 지나면 아우구스투스스트라세(Augustusstraße)다. 오른쪽 건물은 드레스덴 고등법원 건물이다. 거리 왼쪽은 교통박물관에서 드레스덴 성으로 연결되는 외벽이다. 왕자의 행렬 혹은 군주의 행렬(Fürstenzug)이라고 하는 마이센 도자기로 제작된 타일 그림을 볼 수 있다.

6시 반경 드레스덴 구시가를 떠나 저녁을 먹으러갔다.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든 것은 8시. 다른 여행보다는 비교적 여유가 있는 일정인 셈이다. 숙소는 구시가의 동쪽으로 들어선 신시가의 남쪽 변두리에 있는 윈드햄 가든 드레스덴(Wyndham Garden Dresden)이다. 독일 구경에 나선지 여섯 번째 날이다. 이틀 전부터 뻐근하던 허리가 많이 수월해졌다. 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걸어 다니거나 서있는 시간이 많아서 허리에 무리가 가는 모양이다. 낮에도 구경하는 짬짬이 앉아서 쉬어야겠다. 나이가 들면 구경하는 것도 큰일이다. 

이날은 8시에 숙소를 나서기로 했는데, 일행들이 약속시간보다 이르게 모였기 때문에 조금 일찍 베를린을 향해 출발했다. 숙소가 주택가에 있어 조용한 줄 알았더니 신시가의 변두리 지역에 있었던 모양이다. 오가는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 한다. 휴가철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버스가 숙소를 떠난 잠시 후 창밖의 풍경이 바뀐다. 도로변에 나무로 된 담장이 이어지는데 보니, 아담한 크기의 텃밭들이 담장 안에 숨어있다. 드레스덴 시내에 사는 사람들이 주말에 와서 가꾸는 주말농장이라고 했다. 

주말농장도 지나면서 숲이 나타나는데, 숲의 나무도 바뀐다. 도토리나무가 많더니 이젠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많아진다. 독일 중부에서 북부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오 탄넨바움(O Tannenbaum)’이라는 동요가 떠오른다. 탄넨바움은 전나무인데 우리나라에는 ‘소나무야’라는 제목으로 번안됐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의 교사이자 작곡가였던 에른스트 안쉬츠(Ernst Anschütz)가 1824년에 슐레지엔의 민요를 바탕으로 작곡한 노래이다. 

안쉬츠의 ‘오 탄넨바움(O Tannenbaum)’은 자르낙(Zarnack)이 채보해 발표한 것을 바탕으로 했다. 포츠담에서 활동한 설교자이자 교사이며, 독일 민속음악 수집가 요아킴 아우구스트 크리스티안 자르낙(Joachim August Christian Zarnack)은 자신이 채보한 독일민속음악 가운데 초등학생들에게 맞는 동요들을 골라 1820년에 출판했다. 그 가운데 연가(Liebeslied)라 할 ‘오 탄넨바움(O Tannenbaum)’이 들어있다. 

자르낙은 “전나무야, 전나무야! / 기품 있는 나무야! / 너는 겨울에도 푸르게 빛나고 있구나 / 여름철과 마찬가지로!(O Tannebaum, o Tannebaum! / Du bist ein edles Reis! / Du grünest in dem Winter, / Als wie zur Sommerszeit!)”라는 노랫말로 시작해 사시사철 푸른 전나무를 신실한 나무의 상징으로 비유했지만, 다른 연에서는 “아가씨여, 아가씨여! / 그대의 마음은 왜 그렇게 오락가락 하나요!(O Mägdelein, o Mägdelein, / Wie falsch ist dein Gemüte!)”라고 한탄했다.

하지만 안쉬츠의 ‘오 탄넨바움(O Tannenbaum)’에서는 자르낙의 사랑에 관한 노랫말 대신 전나무의 신실함에 관한 주제를 끝까지 이어간다. 세월이 흐르면서 안쉬츠의 ‘오 탄넨바움(O Tannenbaum)’은 크리스마스 철이 되면 캐럴로 불리게 됐는데, 영어로는 아예 ‘오 크리스마스 나무여(Oh, Christmas Tree!)’로 번안됐다. 

뿐만 아니라 영국 노동당은 이 노래를 개사한 ‘적기가(The Red Flag)’를 비공식 당가로 쓰고 있으며, 미국의 메릴랜드, 미시간, 아이오와, 플로리다 주 등이 주가로 사용했거나 사용 중이다. 영국 프로축구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응원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번안 소개된 ‘소나무야’는 오히려 자르낙의 원곡에 가까운 가사라 하겠다.

드레스덴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고속도로 사정은 원활하다. 다만 엷게 깔렸던 구름이 짙어지기라도 하면 비가 쏟아질까 살짝 걱정도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이날 베를린의 날씨는 해가 나오면 따갑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서늘한 느낌까지 들어 폭염으로 끓고 있다는 서울을 떠나 피서를 제대로 한 셈이라서 행복했다. 10시 반 무렵 베를린(Berlin)에 도착했다. 원래의 일정으로는 포츠담에 먼저 보기로 한 일정이 바뀌었다.

베를린은 독일의 수도이며 1918년 기준으로 374만8148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독일 최대 도시다. 유럽에서도 런던 다음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다. 엘베 강으로 유입되는 하벨 강 지류인 슈프리(Spree) 강의 여러 갈래가 도심을 흐른다. 슈프리 강은 체코와의 국경 부근에 펼쳐지는 루사티안 고원(Lausitzer Bergland)에서 발원해 베를린 서쪽에서 하벨 강에 합류하기까지 작센, 브란덴부르크, 베를린에 이르는 400㎞를 흐른다.

베를린 가까이에는 슈프리 강과 하벨 강의 흐름에 많은 호수들이 형성돼있다. 이런 지형적 특징이 베를린이라는 이름에 들어있다. 베를린 지역에는 서슬라브족이 게르만족에 앞서 이주해왔다. 베를린을 포함한 동부 독일 지역의 이름에 슬라브어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유이다. 베를린이라는 도시 이름은 서슬라브족이 사용하던 폴라비아(Polabia)어에서 습지, 혹은 늪을 의미하는 어간 베를(berl/birl)로부터 유래했다. 

지금의 베를린 지역에 사람들이 정착한 흔적으로는 미테(Mitte) 지역에서 발굴된 대략 1174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집기초의 잔해와 1192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빔이 있다. 한편 베를린의 중앙에 있는 피셔인셀(Fischerinsel, 어부의 섬)에 있던 쾰른(Cölln)이라는 마을이 1237년에, 그리고 피셔인셀에서 보아 슈프리강 건너편에 있는 니콜라이퓌에텔(Nikolaiviertel)이 1244년에 문서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피셔인셀의 북쪽에는 여러 개의 박물관이 들어서 있어 박물관 섬이라고도 부른다.

1415년 호헨졸레른 가문의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가 브란덴브르크 변경백이자 선제후가 됐다. 호헨졸레른 가문은 1918년까지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를 이어가다가 프로이센의 왕이 되고 결국 독일제국의 황제를 배출했다. 1618년 시작돼 1648년까지 이어진 30년 전쟁으로 베를린은 인구의 절반을 잃고 가옥의 3분의 1이 부서지거나 무너지고 말았다. 

전쟁 기간 중인 1640년에 선제후가 된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은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고 이민을 장려했으며, 1685년에는 포츠담 칙령을 내려 프랑스 위그노파의 망명을 받아들이기고 했다. 그 결과 1700년에는 베를린 시민의 30%가 이민 온 위그노 신도였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프로이센 왕국을 선포하고 프리드리히 1세 왕이 됐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이 중앙집권 정책을 펴면서 왕국의 수도 베를린도 커지기 시작했다. 1709년에는 쾰른(Cölln), 프리드리히스베더(Friedrichswerder), 프리드리히슈타트(Friedrichstadt), 도로틴슈타트 (Dorotheenstadt) 등 4개의 도시를 베를린에 합병했다. 

19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베를린의 경제와 인구 규모가 극적으로 확대됐다. 독일의 철도망의 허브이자 경제 중심지가 됐고, 베를린 교외 지역이 추가로 베를린에 통합됐다. 1871년, 베를린은 새롭게 설립된 독일 제국의 수도가 됐다. 20세기 초, 베를린은 건축, 회화 및 영화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독일 표현주의 운동의 중심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들어선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베를린이 수도였으며, 경제적 불확실성으로 정치적으로는 불안을 겪었지만, 베를린은 여전히 독일의 중심이었다. 1920년에는 주변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흡수해 면적은 12배, 인구는 2배인 400만명에 달했다. 과학, 기술, 예술, 인문학, 도시 계획, 영화, 고등 교육, 정부 및 산업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베를린은 연합군의 주요 공격목표였다. 연합군은 6만7607톤의 폭탄을 도시에 퍼부어 6427에이커(약 26㎢)를 파괴했고, 대략 12만5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전후 연합군은 독일을 분할해 점령한 것과 마찬가지로 베를린을 4개 지역으로 나눠 점령했다. 미국, 영국 및 프랑스 등 서방 연합국은 베를린의 서쪽을, 소련은 동쪽을 차지했다. 

연합군은 베를린 전체의 행정책임을 공유했지만, 1948년 서방 연합국이 서독에서 시행한 화폐개혁을 서베를린으로 확대하자 1948년 6월 소련은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가는 통로를 봉쇄했다. 1949년 5월 봉쇄를 해제할 때까지 연합국은 항공편으로 식량과 일용품을 공급해 소련의 봉쇄에 맞섰다. 결국 1949년 서방측측은 독일 연방공화국을 소련은 독일민주공화국을 세우는 것으로 전후처리가 종료됐다. 1961년, 동독은 동서 베를린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했다. 1989년 11월 9일 동서독 간에 통행의 자유가 선언될 때까지 베를린 장벽은 소련과 서방세계가 대립하던 냉전시대의 상징이 됐다.

베를린에 도착해 처음 일정을 시작한 장소는 공포의 지지(地誌, Topographie des Terrors)라는 이름의 역사박물관이다. 1961년 동독 수비대가 미국 외교관의 여행서류를 조사할 권한이 있는지를 두고 분쟁이 일었을 때, 10대의 소련군 탱크와 같은 수의 미군 탱크가 대치하던 동서 베를린의 국경 교차점 찰리 검문소(Checkpoint Charlie)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의 제3제국 기간 니더키르히너스트라세(Niederkirchnerstrasse)에 밀집해있던 친위대(SS)의 주요 보안사무소, 보안경찰(Sicherheitspolizei), 전개 그룹(Einsatzgruppen), 게슈타포(Gestapo) 등의 본부가 있던 부지에 박물관을 짓고 야외전시장을 조성했다. 전후 폐허가 됐던 이곳은 1950년대 들어 정비해 범퍼카 시설로 사용됐다. 

1980년대 들어 많은 정치범들이 고문을 받고, 처형된 게슈타포 본부의 지하실이 발견돼 발굴됐고, 1987년 베를린 창설 7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로 첫 번째 관련 자료의 전시회가 열렸다. 발굴된 장소는 덮개를 씌워 보존했지만, 상설전시를 위한 센터 건설과 유적의 보존을 위한 조치가 필요하게 됐다. 공모절차를 거쳐 2006년 건축가 우르술라 빌름스(Ursula Wilms)와 조경가 하인츠 W. 할만(Heinz W. Hallmann)의 설계에 따라 건축이 시작해 2010년 완공됐다.

야외전시장은 지상에 남아있는 베를린장벽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던 건물의 지하공간을 발굴해 벽을 노출시켰고, 투명한 유리로 덮개를 씌워 보호했다. 지하 전시공간에는 나치의 만행에 관한 사진을 비롯한 다양한 전시물이 게시돼있다. 800㎡규모의 상설전시관에는 나치의 보안부서에서 사용하던 다양한 고문 장비를 비롯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지하실에는 세미나실을 비롯해 약 2만5000권을 소장한 도서관, 추모 재단 등이 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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