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세화민속오일장 그리고 백약이오름

제주도에서 1년…세화민속오일장 그리고 백약이오름

기사승인 2019-09-14 00:00:00


제주에 여행 중이라 하지만 1년 동안 완전히 집을 떠나 있을 수는 없다. 애초부터 집안에 중요한 대소사가 있을 때는 잠시 집으로 돌아가 열흘 정도는 머물 생각이었다. 추석 명절 쇠러가기 전에 보낼 선물은 제주의 오일장에서 구입했다.

제주엔 아직 오일장이 여러 곳에서 열리는데, 민속오일장이란 이름으로 제주시, 한림, 표선, 세화에 제법 큰 장이 선다. 지금 머물고 있는 함덕에도 오일장이 있다. 그러나 함덕오일장은 규모가 매우 작아서 추석선물 구입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세화해변에 세화오일장은 제법 규모가 크다. 마침 풋귤 나올 때가 되었다 해서 지난 8월 20일 처음 세화민속오일장을 찾아갔다. 생선을 살피며 관심을 보여도 돌아오는 반응이 거의 없다. 모두들 생선 손질에만 바쁘게 보인다. 여전히 나는 이러한 무심함이 익숙하지 않다.

가공 생선 상점에 서 있던 청년이 옥돔을 보고 가라며 말을 건넨다. 잠시 관심을 보이자 그는 일사천리로 제주산 옥돔과 수입산 옥돔이 어떻게 다른지 두 상품을 비교하며 설명을 한다. 옥돔과 비슷한 옥두어는 시장에서 대부분 그냥 바구니에 여러 마리 한꺼번에 올려놓고 파는데 있는데 매우 값 싸단다. 가끔 이 옥두어를 외지인들에게 중국산 옥돔이라 말하며 팔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게다가 옥두어는 맛도 옥돔보다는 좋지 않으니 가급적이면 옥돔을 권해드린다며 냉장고 문을 열고는 크기 별로 가격을 따져준다. 그새 몇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그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발길을 돌리는데 필요한 것 있으면 아무 때고 연락하라며 명함을 건넨다.

과일 상점이 모여 있는 곳에는 역시 귤의 고향 제주답게 벌써 다양한 품종의 귤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도 역시 젊은 청년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제주산 망고라며 깎아서 한 조각씩 건네주며 맛보고 가라니 이 오일장마당에서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결국 이들에게서 풋귤 5킬로를 샀다. 너무 조금 샀다고 실망하는 표정은 없고 풋귤청 담는 방법은 알고 있는지 묻고는 다음에 또 오시라 깍듯이 인사까지 한다.

추석선물로 제주과일과 생선을 놓고 저울질하다가 생선을 보내기로 했다. 팔월 마지막 세화장에서 추석선물을 주문했다. 열흘 전 나와 아내가, 말하자면, 면접을 보았던 그 청년은 그날 거의 한 시간 넘게 옥돔 박스 포장하고, 지나가다 관심보이는 손님 상대하느라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다.

8월말부터 제주에 늦은 장마가 찾아왔다. 거의 일주일 매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더니 태풍 링링이 지나갔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쳐 유리창 흔들리는 소리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제주도의 비는 대부분 강한 바람과 함께 내리니 우산도 무용지물이라 비 내리는 날은 집에서 보낸다. 하늘이 맑아져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올 요량으로 나서면 감당할 수 없는 비가 쏟아지곤 하니 여전히 제주도의 비는 낯설다.

1990년 9월에도 태풍과 함께 큰 비가 왔었다. 그 빗물에 면접 기회 하나를 놓쳤던 기억은 30년이 지나가는 오늘도 생생하다. 그만큼 취업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9월 중순이 되도록 나는 마땅한 취업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씩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조간과 석간신문의 구인광고를 꼼꼼히 살피던 어느 날 일전에 보았던 구인광고가 다시 눈에 띄었다. 문구와 크기도 똑같았다. 신문사의 실수가 아니고 다시 낸 광고임을 확인하고는 지난번에 준비했다가 보내지 못했던 서류를 접수했다.

그리고 10월 초에 첫 면접이 있었다. 그 이후 주말이 가까워지면 월요일 오전에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매주 한 번씩 여러 명의 면접관을 만났다. 응시자를 배려한 것인지 늘 다른 면접 대기자는 보이지 않았다. 병원의 간행물 담당자 채용에 이렇듯 반복적으로 면접을 보는 이유는 알지 못한 채 10월이 지나갔다. 11월 중순이 되어서야 면접이 마무리 되었다. 한 달 보름동안 여섯 번의 면접의 내용은 나와 부모님이 살아온 이야기였다.

마지막 면접에서는 가운을 입은 원로 의사까지 여러 면접관이 앉아 있었다. 부모님 관련 질문, 가족관계, 흡연과 음주, 종교 등 여러 질문에 솔직하게 답변을 하고 나니 잠시 나가서 기다리란다. 앞서 면접을 보았던 응시자는 가고 없으니 내가 이곳에 취업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갔디?”
“네.”
그렇게 네 번째 직장이 결정되었다. 내 앞에 새로운 길이 펼쳐졌다.

백약이오름 앞에 서면 오름 위까지의 길이 한 눈에 보인다.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 사는 길도 가끔은 저렇게 꽤 멀리까지 잘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걷기 시작한다.

가축 방목을 위한 목초지 너머 오름 아래쪽엔 삼나무 조림지가 있고 위쪽으로 아직 어린 곰솔 군락지가 보인다. 백약이오름도 용눈이오름과 비슷한 민둥산 형태의 오름이었다가 숲이 조금씩 형성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곳은 결혼을 앞둔 신랑과 신부의 사진촬영 장소로 꽤 널이 알려진 곳이었다. 길 양쪽의 목초지와 오름까지의 시야가 워낙 시원하게 트여 있어서 어떠한 방향으로 촬영을 해도 만족스러운 사진을 찍을 수 있을 듯했다. 이곳에 와 오름에 오르지는 않고 목초지 언저리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최근 서귀포시에서 백약이오름 탐방로 정비를 하면서 길 양쪽에 기둥과 밧줄을 설치해 목초지 출입을 차단했다. 이젠 이 목초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가 쉽지는 않을 듯하다. 그래도 여전히 치렁치렁한 희색 치마를 입은 아가씨들이 여럿 보인다. 길 양쪽의 기둥들이 조금 방해가 되기는 하지만 몇몇 젊은이들이 길 중간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때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그럽게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촬영하는 이들이 다른 사람이 카메라 시야에 방해되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나는 그들의 카메라 화면에서 사라지기 위해 부지런히 걸었다.

약초가 많이 자라기 때문에 백약이오름 (百藥岳)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말이 생각나 오름을 오르며 꽃과 풀을 살폈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초목은 없었다. 꽃 핀 잔대 몇 포기로 만족을 하며 오르다 오던 길을 뒤돌아보니 눈이 참 시원하다. 목초지 근처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예쁜 사진을 얻으려 애쓰고, 더 멀리 보니 온통 초록세상이다. 그런데 백약이오름의 이 길은 마지막에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 올라왔나 했는데 길이 왼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 끝에서 정상의 능선에 올라섰다.

백약이오름의 분화구는 다랑쉬오름이나 산굼부리의 분화구만큼 웅장하지도 않고, 용눈이오름처럼 여러 분화구가 겹친 특별한 모양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경사면을 따라 분화구 숲이 꽤 짙었다. 어쩌면 백약이오름은 이 숲에 약초를 숨겨두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름에 올라서면 우선 사방을 둘러보며 시원함을 느끼고 행여 알고 있는 오름이나 지형이 있는지 찾아보는 즐거움이 있다. 이러한 지형들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한라산 동쪽 기슭에선 대부분의 오름에서 공통적으로 성산일출봉을 볼 수 있다. 워낙 독특한 모양이고 보니 제주 지리에 밝지 않아도 우도와 성산일출봉을 구별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록 백약이오름의 분화구 둘레가 크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높낮이 차이가 있어 시시때때로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 어떤 이는 이십분이면 백약이오름 분화구 둘레를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저 앞만 보고 부지런히 걸을 것이 아니라 끝없이 두리번거리며 산책로 주변의 수풀을 살피고, 눈을 들어 사방의 풍경을 보며 ‘좋다’하고 한 마디쯤 혼잣말을 해보아야 한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천천히 걷다보면 처음 보는 꽃과 풀들이 눈에 들어온다. 백약이오름의 능선에서 흰색의 긴 치마 차림으로 공들여 사진을 찍는 사람들까지 백약이오름의 풍경이 되고 있었다.

함덕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자림로에 들어서고 보니 문득 길을 따라 꽤 넓게 삼나무가 벌채되어 있었다. 이곳이 비자림로 확장을 위한 삼나무 벌채를 놓고 제주도 당국과 환경보존운동 단체들 사이에 이견이 표출된 곳이다. 환경문제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오랫동안 성장해 온 자연림도 아니고 인공조림지 일부의 삼나무를 나무를 베어내는 것이 환경에 무슨 문제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인공조림지라 하더라도 수십 년 된 숲의 일부를 제거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들은 제주도가 도로 확장을 위해 비자림를 훼손한다고 오해를 해 우려를 표시하지만 비자림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8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 이 문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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